무정한 사람아, 이 밤도 나의 모든 것을
앗으려 하나, 철 없던 사람아
조덕배, 나의 옛날 이야기 中
올해는 벚꽃이 늦게 핀단다. 딱히 알고 싶은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고 살기엔 크고 작은 네모난 기기들에선 하나같이 올해 봄은 늦게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각기 다른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희창은 이런 쪽으론 영 기본이 된 놈은 아니었다. 이다음 대사나 행동을 어떤 식으로 취하는 게 맞는지조차 감을 못 잡는 그런 텁텁한 인간이다. 그러면서 속으론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켰다.
머리 위엔 아직 피지 못한 벚꽃 나무가 앙상하고 저 앞엔 대신 일찍 핀 목련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기이한 연습을 처음으로 시행할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게 된 건 이 앙상한 나뭇가지 때문이었다. 꽃이 절반은 핀 자리도 있었지만 저 나뭇가지가 자꾸만 시야에 들어왔다. 굳이 좋은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 연습도 아니었기에 묘하게 끌리는 이 자리에 앉자고 말했다. 서현제는 늘 그렇듯 담담히 제안에 응해줬다. 어디에 앉아 뭘 하든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희창은 다시 한번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이는 벚나무를 흘끗 쳐다봤다. 형편없는 벚꽃 상태를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다시 내리깐 시선 끝자락엔 현제의 다리가 보였다. 길게 쭉 뻗은 다리를 타고 올라간 시선은 언제부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까만 눈으로 향했다. 보통은 이때 시작해야 무드 있다고 하는 거겠지.
희창은 잔디 위에 올린 오른손에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지만 그건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하는 게 맞다. 실전도 서로를 위한 연습도 아닌 이상한 요구로 시작한 이 기이한 연습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는 게 맞을 터다.
“할까?”
뜻에 어울리지 않는 덤덤한 물음과 동시에 현제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이 흐트러졌다. 매끄럽고 흰 이마가 드문드문 보였다. 아직 높게 치솟은 햇살 아래 앉은 두 사람의 코끝이 달았다. 봄이니 핑크빛 사랑이라느니, 요즘 지나가는 이마다 우스갯소리로 떠드는 사랑 얘기에 관심 없어도 알 수 있는 봄바람이었다. 괜히 사람 설레게 만드는 바람.
희창은 자신이 느끼는 이 달큰한 코끝이 자신의 감정 때문인지 꽃가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라기엔 사치였고 꽃가루라기엔 초라하다. 현제는 희창의 물음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끝으로 정리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참 분위기라곤 하나 없는 물음과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희창의 혀끝은 자꾸만 뾰족하게 세워진 송곳니 끝을 문질러댔다. 긴장감 하나 없이 숙어지는 상체와 달리 몸을 지탱하며 바닥을 짚은 손은 마디 하나하나에 힘이 가해졌다. 처음은 어떻게 닿아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밀어붙인 입술은 제 입술보다 작은 입술과 맞닿았다.
포개진 입술은 몇 번의 머뭇거림을 끝으로 동시에 벌어졌다. 자꾸만 닿는 코끝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홱 돌려버리기엔 서로의 광대와 볼에 코가 짓눌릴 것만 같았다. 희창만 의식한 건 아닌지 쌍꺼풀 진 두 눈도 희창의 코를 흘끗 쳐다봤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문대기만 하는 이상한 상황. 괜히 코로 숨쉬긴 불편해 입으로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우습게도 그 숨조차 둘 다 안정적이라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어설픔이었다. 결국 희창을 올려보느라 위로 치켜든 현제의 턱이 먼저 얼굴 전체와 함께 옆으로 비틀렸다.
한 번 맞닿은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마주한 채로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밀어붙였다. 코끝은 서로를 아슬하게 비껴갔다. 스치듯 본 적은 화면 속 수많은 연출된 키스신들이 떠올랐다. 희창은 그 어느 것도 따라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아까 전까지 자신의 코끝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사실 꽃가루여도 좋으니 이번엔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벌어진 두 입술이 뭉개지고 희창의 혀가 먼저 현제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스치듯 닿은 가지런한 이를 지나 살짝 앞으로 빠져나온 현제의 혀에 닿았다. 간지러웠다. 혀끝과 혀끝이 닿았고 이내 깊숙이 미끄러졌다. 뒤엉킨 두 혀 옆으로 아까보다 달아오른 숨이 새어 나왔다.
희창은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는 까만 눈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쌍꺼풀 위로 올라선 속눈썹, 그 아래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내린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 지조차 몰라, 결국 완전히 시야를 덮어버렸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짚은 손 하나와 길을 잃고 결국엔 제 허벅지 위에 어중간하게 둬버린 다른 한 손. 암전된 시야에도 입술은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갔다. 두 혀가 타액에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애먼 곳을 향해 뻗어갔다 서로를 찾아갔다. 서투르게 흐를 뻔한 타액을 한 번 삼키자,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그 소리에 홀로 놀라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한참 뒤엉켰던 혀가 서서히 풀리고 그 새로 여전히 안정적인 숨 한 번 토해내던 참이었다. 현제의 부드러운 혀끝이 희창의 송곳니를 비롯한 치열을 한 번 쭉 훑었다. 희창은 숨을 내뱉으려다 순간적으로 호흡을 참아버렸다. 그리곤 그대로 참은 호흡을 끌어안고 현제의 윗입술을 입술로 물었다. 현제의 입술도 그를 따라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희창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몇 번의 오물거림과 작게 까딱여지는 두 고개. 진득한 타액이 길게 늘어지기는커녕 짧게 끊어지며 두 사람의 입술도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떠진 눈앞에는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쓸어 닦는 제현이 있었다. 상기된 얼굴, 벅찬 호흡, 이런 것 하나 없이 평소와 같은 얼굴에 희창은 길게 내쉬려던 숨을 억눌렀다. 키스라 부르기도 모호하고 그렇다고 키스가 아닌 것도 아닌 참 애매한 입맞춤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상대를 따라 매무새나 무심히 정리한다. 촉촉해진 입술을 습관처럼 닦아내려다 말았다. 이것마저 닦아내면 정말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희창은 아까 억눌렀던 숨을 헛기침과 함께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잔디밭 저 너머 아래에 있는 가로등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음악과 거리라 눈을 뜨고 달뜬 숨을 남몰래 흘리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수줍어서 말 못 했나 내가 싫어 말 안 했나. 지금도 난 알 수 없어요.
가사를 다 아는 노래가 많지 않은 희창이 아는 노래 중 하나였다. 알바했을 때 매장에서 지겹도록 틀어 가사와 뜻까지 알아버린 곡. 속으로 노래 가사를 함께 읊었다. 무의식적으로 읊은 문장이었다. 희창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노래로 남몰래 잘게 떨리는 마음을 숨죽였다.
알게 모르게 경직되어있었던 몸이 풀리고 고작 그 짧은 몇 분을 지탱해준 손에도 힘이 빠지던 때였다. 익숙한 손이 손등 위로 올라왔다. 고갤 돌려보니 현제의 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올라온 손. 자극적이기보다 오히려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던 짧은 입맞춤과 같은 손이었다. 희창의 손 위에 손을 올린 현제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새하얀 목련을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쓰는 상대와는 달리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감은 두 눈. 희미하게 들려오는 낡은 스피커 속 노래를 희창과 똑같이 속으로 읊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희창은 그런 현제에게 시선을 떼고 싶었지만 뗄 수 없었다. 차마 앞에서 마주하기 쑥스러워서 내렸던 눈꺼풀이 참 비겁하다는 걸 알았다. 사실은 이 이상야릇한 연습조차 비겁하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사막 속에서 이 감정만이 주희창에겐 사치며 가장 투박하면서도 뭉툭한 것이었다.
또 봄바람이 불었다. 현제의 긴 검정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들썩였다. 살짝 치켜올린 턱과 그보다 높은 코. 그에 비해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웠던 흰 코끝. 너도 나처럼 눈을 감았을까, 아니면 그 까만 눈으로 날 끝까지 바라봤을까.
"꽃 예쁘다."
눈을 감은 현제가 말했다. 희창은 현제를 따라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응, 그러네."
희창은 그런 현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리고 그다음 밤도……. 마지막 문장까지 내뱉은 멜로디가 끝맺음한다. 목덜미를 채 덮지 못한 머리카락 사이로 봄바람이 스며들었다. 이 노래 속 건너편 집 소녀를 짝사랑하던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온전한 온점 없이 물음표들만 남아버린 첫 연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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