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하는 것이 쉽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제겐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었다. 하윤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들끓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장에서 가쁘게 펌프질하던 피가 사지가 아닌 온통 머리로 몰리는 기분이란 생각보다 더 더러웠다. 표현이 좀 세긴 해도 확실한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표현보다는 좀 더.
“웬일로 애가 멍때리네.”
딱, 하고 중지와 검지가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그제야 멍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고갤 떨궜다. 시선 아래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근 여루가 보였다.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여루가 욕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 위로 방울진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어후, 오늘은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벌써 덥네.”
열기에 볼이 붉게 물든 여루가 허리 아래까지 축 처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끌어올렸다. 한쪽 어깨로 넘긴 머리카락이 쇄골을 타 가슴, 아랫배까지 축 늘어졌다. 물을 머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길어 보였다. 하윤은 제 시선이 가면 안 되는 곳임을 알아도 저절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루는 하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손을 얹었다. 목덜미였다. 열기에 평소보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엔 잇자국 세 개가 선명히 새겨있었다. 평소라면 딱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그 하나도 마음에 들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잇자국이 세 개나 있었다. 하윤은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여루의 목덜미를 쳐다봤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감히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내 목덜미 뚫리겠다.”
하윤의 굳은 얼굴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던 여루가 말했다. 여루는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찢긴 살갗에선 피가 흐르진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피가 흐를 듯 붉었다.
“셰이넌이 오늘 실수로 이를 잘못 박아넣었어. 평소라면 알아서 잘하는 놈이 두 번이나 실수했지 뭐야.”
그렇다고 해서 막 엄청 아프지는 않았지만. 하윤은 여루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길게 뻗어진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이 아슬아슬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제 주인께서 아프지 않으셨다니 그거야말로 다행이지 않은가. 문제는 제 주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나 그놈은 거짓을 말했다. 실수라니. 이 한 번 대충 처박으면 되는데 실수로 박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
하윤은 어떻게든 제 표정을 풀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 주인께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그대로 입 밖으로 토해내기도 뭣했다. 저가 뭐라고. 아니, 그보다 사실은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셰이넌을 향한 비난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제 주인이 절 뭐라 생각하겠는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늑대. 딱 그 정도로 볼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젠장.
하윤은 머리가 뜨거워 미칠 것만 같았다. 제가 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뭔지 헷갈렸다. 시야는 뚜렷한데 정신은 멍했다. 하윤은 지금 여루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조차 다 안다는 것을 안다. 얼마나 한심할까. 당장이라도 손에 쥔 수건에 얼굴을 처박고 싶었다. 대상이 불분명한 짜증과 분노가 들끓었다.
여루는 가만히 하윤을 올려다봤다. 제 앞에서나마 표정이 좀 많은 편인 건 알았으나, 이렇게까지 표정 관리 못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어지간히 셰이넌이 싫은가 보지. 여루는 제 옆에 서서 굳은 얼굴 하나 치우지 못하고 이를 사리문 새끼늑대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다 클까.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확실한 건 지금 하윤에게 필요한 건 혼자 생각할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 여루는 욕조에 몸을 더 담그고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 이상 끝까지 지키고 있을 놈이기에, 저라도 먼저 일어나서 시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상념에 빠져있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굳어있었는지 가만히 서 있던 하윤이 살짝 당황한 듯 어깰 잘게 떨었다.
“벌써 일어나시게요?”
“응.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하윤은 뒤늦게서야 여루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여루는 욕조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여루는 제게 수건을 가져다 대려는 하윤의 손을 잡았다. 어째 평소보다 더 열이 오른 늑대의 손에 물기가 가득 묻었다. 여루는 하윤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내며 말했다.
“내가 할게. 너 먼저 방에 들어가.”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어허, 내가 하겠다니까?”
“제 일입니다. 제가 하겠…….”
“윤아, 들어가.”
명백한 명령이다. 여루는 하윤에게서 뺏어 든 수건으로 아무런 표정 없이 제 몸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하윤은 여루가 제게 이런 명령을 내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제게 시간을 주겠다는 배려였다. 하지만 하윤은 그 배려가 마냥 달갑지 못했다. 그 이유조차 차마 문장으로 만들지 못한 채, 하윤은 눈썹을 짧게 들썩이다 고갤 숙였다. 아랫입술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스쳤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얼굴이 뜨거웠다. 욕조 물의 열기 때문인지, 본래 높은 제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미친 듯이 핑핑 도는 이 빌어먹을 피 때문인지. 하윤은 물기 가득한 손으로 뜨거운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며 욕실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제 얼굴을 식히는 차가운 공기가 닿았음에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늑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한참을 침대 위 앉았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열기는 오래전에 가셨는데도, 머리로 몰린 피가 이젠 온몸으로 다 퍼져나갔는데도 그랬다. 육신은 진정했는데 정신은 진정하지 못했다. 제정신으로 앓는 열병은 생각보다 더 독했다.
하윤은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손목에서 나는 향에 숨을 잠시 틀어막았다. 주신의 목욕 시중을 들고나면 늘 나는 향이다. 주신의 몸에서 나는 그 향. 하윤은 천천히 틀어막았던 숨을 틔며 손목에 코를 짓누르듯 박았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주신의 향이 나는 것이 좋았다. 좋기만 할까. 그렇게 안 되던 진정도 이젠 서서히 되는 듯, 쿵쿵 내리찧던 심장 박동도 느슨해졌다.
여전히 손목에 코를 박은 채 고갤 살짝 틀었다. 열기를 식힌답시고 살짝 열어둔 창으로 제 모습이 보였다.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을 헝클어져 엉망이었고 셔츠의 소매는 위로 끌어 올려져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붉었고 보이는 것은 미세하게 떨리는 제 눈 밑과 탁한 눈동자뿐이었다.
하윤은 코에 밀어붙인 손목이 아닌 다른 손을 들었다. 단추 두 개가 풀린 와이셔츠의 깃 부분을 하염없이 매만지며 숨을 들이켰다. 저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이 와중에도 주신이 보고 싶었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이제 슬슬 평소처럼 대해도 되겠지. 여루는 읽던 책을 덮었다. 시계를 보자니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였다. 여루가 하윤에게 평소와 다르게 대한 지도 3일이 지났다. 그날 이후로 여루는 하윤에게 말도 덜 걸고 일도 덜 시켰다. 셰이넌의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그쯤부턴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하윤을 불러내지 않았다. 물론 하윤도 이에 반발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셰이넌이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애초에 무슨 흡혈귀의 이가 빨대도 아니고. 그냥 살을 뚫어서 피를 내면 그걸 핥아먹는 식이다. 하윤도 그걸 잘 아니 딱히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여루는 그날 욕실에서의 하윤을 떠올렸다. 정말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여루는 불을 끄고 침대 옆 조명만 잠시 켜뒀다. 자기 전에 물 한 잔만 딱 마시려고 했는데 하필 물이 다 떨어졌다. 하윤이 아까 못 갈았나 보네. 하긴 내가 부르지도 않았으니 오기가 그랬겠지. 여루는 물병을 들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직접 주방으로 가 물을 채울 생각이었다. 물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하윤이 들어오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잊고 물을 못 갈아드렸습니다.”
노크 몇 번과 주신의 허락을 받은 하윤이 들어왔다. 손에는 물이 가득 채워진 물병이 있었다.
“괜찮아. 마침 목 말랐는데 타이밍 좋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루가 물병을 도로 제자리에 두고 침대에 앉았다. 푹신한 침대에 작은 반동이 일었다. 하윤은 여루의 앞으로 와, 새 물병을 탁자 위에 두고 텅 빈 물병은 옆으로 치웠다. 이제 가려나 싶던 하윤이 고갤 틀어 여루를 내려다본 것도 동시였다. 여루와 눈이 마주친 하윤은 살짝 눈꺼풀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내려간 눈꺼풀 끝에 긴 속눈썹이 축 늘어졌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뭘 말하는지 알면서도 물었다. 하윤의 성격상 본인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하나하나 말하며 사과를 할 아이이기에, 여루는 괜히 되물어줬다. 그 행동이 마치 어린 남자아이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제 사사로운 감정 기복으로 여루님께서 신경 쓰이게까지 만든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사과 하난 참 잘했다. 여루는 분명 제 시선 위에 있음에도 이상하게 내려다보는 기분이 드는 하윤을 올려다보았다. 탁한 눈동자가 속눈썹에 감겨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보였다. 제 눈을 보는 것보단 그 아래를 보는 것 같았다. 여루는 팔을 뻗어 하윤의 턱을 잡았다.
“어딜 보니? 날 봐야지.”
하윤은 갑작스레 닿은 따스한 손에 고갤 살짝 꿈틀거렸다.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축 내려간 시선이 함께 올라가더니 제 앞에 앉은 이를 담게 하였다. 하윤은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알았다. 주신의 몸에 내려앉은 달빛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분명 달을 등지고 섰는데도 내려앉은 달빛보다 더 은은하게 빛났다. 아름답다는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이였다.
여루는 절 멍하니 내려다보는 하윤의 손에 깍지를 꼈다. 깍지를 낀 손을 가볍게 흔들더니 입꼬릴 올려 웃었다.
“언제 다 크지? 손은 이렇게 큰데.”
분명 깍지를 낀 두 손이지만 사실 하윤의 손에 여루의 손이 잡아먹힌 꼴 같았다. 그 모습에 여루가 장난스레 깍지를 낀 손가락에 힘을 줬다 뺐다 반복했다. 그 간지러운 장난에 하윤은 결국 여루를 따라 입꼬릴 올리며 깍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다 큰 상태입니다.”
“맞아, 너 다 컸어.”
여루가 깍지를 낀 손을 풀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절로 몸이 여루 쪽으로 더 당겨진 하윤이 주춤 다가갔다.
“윤아.”
“...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았다.
“나 너 안 버려. 너 내 거잖아.”
하윤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아주 작게 벌어진 틈새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우습게도 늑대는 주신의 그 한마디에 그날이 떠올랐다. 주신이 제게 불멸을 안겨주던 그 날. 그날부터 주신은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내 첫 번째 가족이라고. 우습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지 않겠다고,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 하는 일은 다시는 없으리라고, 다짐이란 다짐을 그렇게 해놓고 들이켜는 숨이 뜨거웠다.
주신이 어떤 의도로 제게 저런 말을 해주는지 잘 안다. 그저 가족이라는 그 말과 같은 말인데도, 고작 가족이라는 단어를 빼고 만든 그 문장이 다 큰 늑대를 또다시 어린 늑대로 만들었다. 하윤은 고갤 살짝 떨구는가 싶더니 그대로 여루와 깍지를 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그대로 힘을 가해 깍지를 낀 손과 그곳에 깊게 파묻은 제 얼굴을 여루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풍겨오는 주신의 향이 자비롭기 그지없었다.
하윤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숨이 가쁘지도 않고 온몸이 뜨겁지도 않은데 입꼬리가 내려가질 못했다. 하윤은 상체를 푹 숙인 그 상태로 여루와 깍진 손과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대답했다.
“...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여루는 평소답지 않게 제게 안겨 오는 늑대를 기꺼이 안아줬다. 하윤의 어깨에 턱을 올리자니, 내려간 시선 끝으로 느릿하게 실랑이는 꼬리가 보였다. 여루는 늑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지만 딱히 정정하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늑대가 어리기만 하지만 바보는 아니니까. 따스한 등을 쓸어주는 손이 부드러웠다. 다 컸다고 말하는 늑대는 여전히 어린 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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