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타입 샘플/A.단문 타입

1차 / GL

by JJH_ 2021. 10. 3.

 사랑해본 적도 없는데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

 

손이 닿은 것도 눈이 마주친 것도, 애초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리엔시에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지나 단숨에 머리 끝까지 치솟은 이 피와 열감이 뜻하는 것을. 절 등지고 십자가 아래에 고갤 숙인 세라엘의 옅은 머리카락 사이로 창백한 뒷덜미가 드러나자, 리엔시에는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심장이 내지르는 감정을 식도 아래로 꾹꾹 눌러 담으며 가슴께에 올린 손끝에 힘을 가했다.

 

식도가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식도를 녹이고 피부까지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리엔시에는 이 뜨거운 감정이 무언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사랑이다. 이 감정에 그 어떤 타감정이 뒤섞여 있다 해도 자신은 이 감정을 오로지 사랑이라 칭해야 한다는 것을. 흔한 가벼운 사랑 한 번 겪어보지도 못한 주제에 알았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역한 세상에 머리를 내민 것임을.

 

 

*??????1

 

 

제 귀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끝이 뾰족하고 길게 솟아오른 귀. 이게 뭐라고 그렇게 혐오하고 징그러워하던지. 혐오를 입 밖에 내밀지 않은 자조차도 그 작은 눈알에 훤히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모두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러 가는데 리엔시에는 홀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배가 고팠다. 어젯밤부터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윗배에선 허함이 느껴졌고 뜨겁게 달궈졌던 식도에선 이젠 쌉쌀한 위액이 넘나들었다.

 

한참을 걸었다. 어딜 가는 것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지, 두 다리가 이끄는 대로 쭉 가야 하는지. 종아리 아래가 땅땅하게 당겨올 정도로 걷던 때였다. 작은 상가들 사이에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골목 사이로 오래되어 이끼가 낀 동상 하나가 보였다. 두 손을 벌린 성모 마리아상이었다. 리엔시에는 골목 안으로 얼굴을 쭉 들이밀었다.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는 오래된 성모 마리아상. 마리아의 이끼 낀 손 위엔 이끼에 파묻힌 낡은 나무 십자가 하나가 있었다.

 

리엔시에는 누가 두고 간 지도 모를 나무 십자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그리곤 달렸다. 뭉치고 뭉쳐 당장이라도 종아리 아래에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다리로 달렸다. 낮은 구두 굽이 포장된 거리를 지나 평평한 흙바닥을 지나더니 종내엔 물기 가득한 고른 잡초들을 지났다. 구두 앞코에 보랏빛이 얹어졌다. 쉬지 않고 달린 다리엔 푸른빛이 얹어졌고 시끄럽게 쿵쿵대는 심장 위엔 노란빛이 얹어졌다. 리엔시에는 제 붉은 눈과 위로 길게 뻗은 뾰족한 귀에 주황빛이 얹어지고서야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다. 코끝엔 햇빛 냄새와 낡은 나무 가구에서 나는 특유의 꿉꿉한 냄새, 그 사이를 떠다니는 옅은 먼지 냄새가 그득했다. 눈은 오로지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형체만을 담는데 귀는 그 무엇도 담으려 하지 않았다. 리엔시에는 자신의 눈이 떼어내질 못하는 형체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엄지 사이를 벌려 두 손을 엇갈려 잡은 뒤, 맞잡은 두 손을 이마 아래에 두었다. 고갤 살짝 숙이면서도 눈꺼풀은 숙이지 못했다. 신을 향해 고갤 숙여 기도하는 형체를 향해 고갤 숙여 기도했다. 그러자 먹먹하게 그 무엇도 들이지 못하던 귀에서 저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에서 누군가가 성경을 읊는 목소리가 작게 들리기 시작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셨으니.

 

리엔시에는 저도 모르게 기도하던 손을 풀고 자신의 귀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길쭉한 귓바퀴를 쓸어내리다 귓불 아래에 달랑이는 금색 십자가 귀걸이가 손끝에 닿았다. 리엔시에는 십자가 중앙에 박힌 작은 사파이어를 검지 끝으로 둥글게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삶은 오로지 육신에 귀속된 정신의 것이며,

 

세라엘이야말로 자신의 삶. 아니 더 나아가 저 그 자체라고. 리엔시에는 한순간에 자신의 뾰족하게 솟아난 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엘을 사랑하기에, 저조차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큰 십자가 아래, 수십 가지의 색과 선에 뒤덮인 형체가 들썩였다. 리엔시에는 그대로 위로 높게 치솟은 로나르힘 대신전 기도실의 문밖으로 내달렸다. 어두운 기도실 너머 하늘은 화창했고 먼지 하나 안 낀 햇볕에선 따뜻하게 데워진 역한 시체 냄새가 났다. 리엔시에는 기도실 밖을 내달리며 고갤 살짝 꺾어보았다. 어두운 기도실 안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성스러운 주신을 향해 오만하게 고갤 쳐들고 기도를 푼 성녀가 보였다. 추락한 49번째 성녀, 세라엘.

 

-어떠한 결정은 삶을 저 구렁 아래로 내몰 수 있다.

 

리엔시에는 대신전 밖을 향해 한참을 내달렸다. 세라엘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정말 사랑이 맞는 걸까, 어제 저택으로 돌아가며 아주 잠시 생각했었다. 리엔시에는 어젯밤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 작게 심겨 있던 질문에 차마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답할 수 있었다. 성녀를 향한 이 감정은 감히 인간들이 써 내린 단어들로는 형용할 수 없다고. 애초에 그런 단어 따위 존재할 수 없다고. 그러니 리엔시에는 그 수많은 단어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가장 흡사한 단어를 빌렸다.

 

-삶은 본래 고달픈 것이며 인간은 실수와 고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심장 안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감정에 새겨넣었다.

 

-이를 저주의 영역이라 부르셨네.

 

 

 

 

 

 

 

'기본타입 샘플 > A.단문 타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차 / -  (0) 2022.04.16
1차 / GL  (0) 2022.04.03
1차 / GL  (0) 2021.12.17
1차 / GL  (0) 2021.10.05
1차 / GL  (0) 2021.09.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