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질렸나 보지. 그럴 나이잖아.”
오색 빛의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던 새 정령이 부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세라엘은 자신의 앞에서 산만하게 두 날개를 퍼덕이는 정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금색 부리가 조잘거리며 뻐끔이는 것이 이토록 짜증 나던 때가 있던가. 오히려 저 뻐끔거리는 부리에서 나올 말들을 기대하던 나날들이 뒤에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저 부리를 손안에 쥐고 꽉 다물게 만들고 싶었다.
“왜 그래?”
거만한 눈빛과 말투. 존재한 후로부터 평생을 그리 살아온 티가 나는 놈이었다. 세라엘은 정령의 물음에 고갤 저었다. 끝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싱거운 말을 슬쩍 내밀었다. 정령은 세라엘의 대답이 영 시원찮은지 두 날개를 고이 접어 세라엘의 허벅지 위에 몸을 뉘었다.
세라엘은 정령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든 눕든 관심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봤다. 얼핏 보면 명상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놓곤 저 작은 머리통 속에는 한 소녀만 가득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관심을 두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딴 곳으로 시선을 둘 수밖에 없는 나이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세라엘은 마치 글을 다시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고 되새겼다. 리엔시에가 신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지 어느새 사흘이다. 그가 성녀의 스토킹을 시작한 후로 가장 긴 시간의 공백이었다.
물론 리엔시에가 이곳에 와서 하는 짓이라곤 먼발치서 자신을 훔쳐본다는 사실 말고 없다는 걸 잘 안다. 그가 이곳에 오든 말든 제 관할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고. 별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영 텁텁한 감이 왼쪽 가슴께를 맴돈다.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하면 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텁텁함. 뭐라 형용하기 모호한 것이 가슴께를 쓸어낸다.
“요즘은 학교에서 나름 잘 지내는 것 같더라.”
전처럼 비품실에 처박히지 않고 말이야. 세라엘의 얇은 치마 천에 부리 끝이 파묻힌 정령이 말했다. 끝에 웃음기가 서린 것이 그날 본 광경이 꽤 우스웠던 것 같다.
“그렇구나.”
세라엘은 정령의 말에 대충 호응해줬다. 눈꺼풀과 함께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간다. 정령은 세라엘의 얼굴을 쭉 훑더니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작은 두 눈을 빙글 돌렸다.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내가?”
세라엘의 창백한 손끝이 정령의 깃털 위로 올라간다.
“그 애 볼 때 재밌어하길래 막상 이 얘기 들으면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성녀님도 똑같구나.”
뭐가 똑같다는 거지? 세라엘은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에도 정령의 말에 되묻지 않고 깃털의 결에 따라 손끝만 열심히 움직였다. 거추장스럽게 입만 쩍 벌어진 것들은 그 짧은 여백을 기다리지 못하고 알아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법이다.
“그 애처럼 성녀님도 짧은 여흥에 불과했나 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중얼거리는 끝말은 세라엘의 치마 천에 묻혔다. 어차피 그 소녀도 여느 사람들처럼 마흔아홉 번째 성녀라는 제 육신이 궁금했겠지. 그러니 한순간의 여흥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님이 분명한 터. 그게 분명한데도 세라엘은 저 말 한마디가 그렇게 신경 쓰였다. 정령이 내뱉은 짧은 문장 속 어떤 단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하나였다. 아, 이 화려한 깃털로 새 펜을 짜내면 얼마나 볼만할까.
뜬 눈의 시선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 쏠리는 이곳에서 쉬이 내뱉지 못할 말을 목구멍 너머로 꾹꾹 담아둔다. 정령은 작은 대가리를 몇 번 까딱였다. 성녀의 싸구려 천이 마음에 드나 보다. 세라엘은 정령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갤 들었다. 해가 낮게 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데도 리엔시에는 오지 않았다. 입안에서 모래알이 굴러가는 듯 텁텁했다.
참 이상하지. 좋은 감정이라도 교류하던 사이였나? 오히려 아니라고 답해야 할 사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와 저도 모르는 새 피어오른 증오가 자리 잡은 관계다. 리엔시에의 입장은 잘 모르겠고 일단 세라엘의 입장으론 그렇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뭐라 칭하는 게 좋을까. 증오, 애정, 질투, 그것도 아니면…….
“성녀님, 불편하신 점 있으신가요?”
세라엘의 식사를 치워주던 어린 수녀가 물었다. 세라엘은 수녀의 물음에 그제야 자신의 눈이 수녀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리엔시에가 변장이라도 해서 들어온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수녀는 양손에 가득 쟁반을 쥐고 두 눈을 끔뻑였다. 세라엘은 그런 수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함께 문 쪽으로 고갯짓 한 번 했다.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허름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 안에선 정적이 흘렀다. 세라엘은 낡은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대고 햇살이 내리비치는 창문을 향해 고갤 돌렸다.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신전 안에선 입단속에 능하지 못한 어린 수녀들의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매일같이 오던 그 영애는 왜 더는 오지 않는 걸까. 이젠 성녀께 질린 것이 분명하다느니 뭐라느니. 며칠 내내 오지 않았으니 이젠 더는 오지 않을 거라더라.
세라엘은 허벅지 위에 창백한 두 손을 올렸다. 슬금슬금, 햇빛이 닿는 곳까지 찬 두 손을 올렸다. 봄이 지나가는 데도 추웠다. 사실은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애초에 그가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내게 득과 실이 오가는가. 그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 문장에 세라엘은 왼쪽 가슴께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세라엘은 뜨거운 햇빛에 미간을 팍 찌푸리면서도 햇빛을 향해 몸을 조금씩 들썩였다. 아무리 쬐도 달궈지지 않는 육신이 이상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이 따라 올라갔다. 힘없이 늘어진 몸과 그 몸을 겨우 지탱해주는 의자 전체에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세라엘의 옅은 색채의 눈동자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온 것은.
세라엘은 나른히 뜬 두 눈에 힘을 주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저 끝이 뾰족하게 선 두 귀. 그 아래에 반짝이는 금색 십자가와 그 중앙에 박힌 푸른색. 어디선가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의 썩은 내가 올라왔다. 장렬한 햇빛 아래 시체를 덜렁 내놓은 것만 같은 냄새였다. 그래, 부패하기 시작한 작은 시체의 썩은 내였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에도 세라엘은 아슬히 뜬 두 눈을 용케 감지 않았다. 흐릿한 시선에 잡힌 붉은 눈동자. 세라엘은 뜨겁게 익어가는 피부에 따가움을 느끼며 알 수 있었다. 이 장렬한 감정은 애증이노라고. 달뜬 호흡을 꾹 누르며 입꼬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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