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트리거 주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가 하더니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릿한 것은 이명만이 맴도는 내 귓속과 뻐근해진 눈꺼풀 안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내 몸속으로 스며든 비릿한 냄새는 뜨겁게 달아오른 혈액을 가로질러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침투하더니, 단숨에 거센 펌프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내 몸속에서 너의 피 냄새와 내 피가 뒤엉겨 퍼지기 시작했다. 그 감각은 이제껏 수없이 봐왔던 글자 속의 단어들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형용할 수 없는 단어들보단 내 저급한 뇌가 내뱉은 말이야말로, 이 감각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참, 좆같다.
“죄송합니다.”
“하하하... 주성아. 이게 지금 몇 분째야. 내가 죄송하다고 그만하라 했는데,”
도연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무언갈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연은 자신의 손에 들린 두꺼운 유리 재떨이에 묻은 주성의 피를 흘끗 훑었다.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내려친 재떨이의 겉면은 더는 투명한 유리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 재떨이를 손목과 함께 가볍게 털어낸 도연의 시선은 마치 제자리로 돌아가듯, 자신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주성을 향했다. 2m에 다다른 거구의 남자가 제 아래에 무릎을 꿇고 피 칠갑을 한 상태라니. 평소라면 그 이질적인 모습에 꼴렸을 자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 묵묵히 제게 머릴 조아리는 남자의 모습에 이유가 분명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자꾸 죄송하다고만 해. 나한테 정말 미안하긴 해?”
“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아. 우리 주성이는 학습 능력이 없나 봐, 그치.”
웃음기 가득 서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올라간 건 도연의 오른손이었다. 피로 칠갑한 손에는 주성의 머리를 수없이 내리친 붉게 물든 재떨이가 있었다. 이어 들린 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짧은 호흡과 둔탁한 소리였다.
“내가, 그만, 죄송하다고, 하라 했잖아.”
퍽, 퍽, 퍽, 퍽. 뚝뚝 끊기는 호흡과 반복된 과격한 움직임에도 도연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도연에게 마치 예를 갖추듯, 얼굴의 반이 붉게 번진 주성의 몸 또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씨발. 이 정도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기어도 모자를 마당에 절 향해 얼굴을 빳빳하게 든 상대의 눈은 한없이 형형하다. 저 빌어먹을 충성심이 참 좋았는데. 절 올려다보는 저 선명한 눈빛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당장 본인의 목에 칼이 박혀도 날 배신하지 않을, 그런 개새끼 같아서 좋았는데...
“근데 왜 이젠 좆같지?”
“...”
“왜지? 씨발. 나도 이젠 모르겠네... 넌 이렇게 평소랑 같은데 난 왜 이러지? 아닌가. 내가 평소에도 이렇게 내 기분 좆같으면 부하 새끼 대가리 터지도록 패는 년인가?”
“아뇨. 그렇, 지 않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뒤지게 처맞곤 개새끼처럼 아부 떠네.”
마치 혼잣말처럼 주절주절 낮게 읊조리던 말에 주성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의 진실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이 맞다. 도연은 자신의 기분이 안 좋다고 남을 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거슬리는 사람이 있어도 때리진 않았다. 차라리 죽였지. 아, 평소 같았음 저 대답이 그렇게 기분 좋아서 실실 웃었을 텐데. 도연은 점점 찌푸려지는 미간에, 살며시 제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은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아부, 아닙니다.”
조금 버거운 호흡에 실린 말의 중간이 애매하게 끊겨 이어졌다. 주성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도연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가 대화 중 눈을 피하는 것이기에,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주성은 자신을 향해 무겁게 내리찍히는 시선을 최대한 피하지 않았다. 그거 말곤 내가 지금 그에게 행할 수 있는 진심은 무엇도 없으니까. 수차례의 충격이 가해진 머리는 웅웅거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피는 찢긴 이마의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주성은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의 정신력이었다.
“그래? 그럼 죄송하다는 것도 아부 아니야?”
“네. 아부 아닙, 니다.”
“그럼 왜 죄송한지 이유를 대라고, 씨발 새끼야!”
콰득. 도연의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유리 재떨이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얼마나 두껍고 단단한지 바닥에 내리꽂히는 충격에 깨져도 쨍그랑, 하는 소리가 아닌 어딘가 균열이 가 부서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자신의 피는 하나도 묻지 않은 붉은 손이 주먹을 쥐었다. 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 도연은 자신의 주먹으로 옆에 있는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쾅! 바닥이 울릴 정도로 세게 울린 나무 책상엔 옅은 금이 하나 가 있었다. 꽉 쥔 주먹이 단숨에 붉게 달아오르더니 삽시에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도연은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기는커녕 그 호흡을 버겁게 받아들이며 숨을 들이켰다.
“내가 뭐 힘든 거 물어봤어? 내가, 씨발, 네가 왜 그년이랑 입술 맞대고 있었는지 설명하라 했어? 아까부터 넌 무슨 고장 난 라디오처럼 죄송하다고만 씨불이지, 내가 그 이유를 처물어보면 넌 또 그 말에도 죄송하다고 입 다물어버리지.”
“...”
“이거 봐, 표주성.”
이미 한계점을 뚫어버린 목소리가 상대의 이름을 낮게 을렀다. 주성은 절 부르는 어딘가 짓눌린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들어 올렸던 고갤 살며시 내렸다. 이젠 차마 그의 눈을 온전히 바라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 순간, 붉게 달아올라 붓기 시작한 손이 그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애써 감추려던 시선이 억지로 절 깔아뭉개는 고압적인 시선과 마주하게 됐다. 그래, 대답도 제대로 못 할 거면 이렇게 눈이라도 제대로 맞춰야지. 도연은 여전히 한껏 올린 입매 속에서 제 이를 힘껏 사리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추한 본능이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한 대만 더 맞으면 중심을 못 잡을 것만 같았다. 아니, 못 잡는다. 주성은 피로 물들어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에 집중하기 위해 조용히 앞니로 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흐릿한 시야와 제 몸을 둘러싼 극통을 억지로 미뤄내며 마주한 검은 눈동자엔, 충성심을 빙자한 자기합리화만이 그득한 개새끼가 절 마주하고 있었다. ...역겹다.
“더 맞기는 싫고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나 보네.”
짧은 정적을 깬 도연의 목소리는 어딘가 그을린 것만 같았다. 몸을 지탱한 허벅지와 허리에 힘을 주며 겨우 중심을 버티는 주성과 그런 주성의 턱이나 쥐어 잡고 이나 부득부득 갈아대는 자신을 누군가가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추하다고 생각하겠지. 추하기만 할까. 특별한 사이? 하다못해 남들처럼 파트너 관계도 아닌 그저 상사와 부하직원인 두 사람의 관계를 뭐라고 칭해야 할까. 그리고 그런 뭣도 없는 관계에 연연하며 홀로 사랑을 운운하는 자신의 꼴은 어떤가. 온몸으로 퍼지던 뜨거운 피가 순식간에 머리로 휘몰아치듯 몰렸다. 시야가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질거렸다. 도연은 느릿하게 두 눈썹을 들썩이며 상체를 숙였다. 이어 한쪽 무릎을 꿇고 제 힘이 끌려 강제로 턱이 치켜 들린 이와 눈을 마주했다. 상대와 시선을 맞춘 검은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돌려서 말 못 해. 난 네가 아니라 네가 말 안 해주면 몰라. 난 씨발, 너처럼 속 비비 꼬인 새끼도 아니고 그냥 돌려서 말할 정도의 대가리도 안 되는 빡대가리라, 빙빙 돌려서 말 못 해.”
“...아닙니다. 이사님, 은...”
“닥치고 사랑한다고 말해.”
“...”
“빈말일 거 알아. 마음에도 없는 말일 거 알아. 근데 난 그 의미 좆도 없는 빈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아니, 이미 미쳤어. 그러니까,”
어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턱을 거칠게 쥐어 잡던 손이 천천히 피가 굳어 거친 볼을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귀에선 이명이 짙게 깔려있던 주성에게조차, 너무나도 애처롭게 들렸었다. 심지어 말끝이 살짝 떨린 것 같기도 하고. 붉게 물들어 흐릿한 시야임에도 주성은 자신의 앞에서 저와 시선을 맞추고 답을 기다리는 여자를 바라봤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뒤로 아무렇게 넘겨져 있었고 얼굴엔 튄 핏방울들이 굳어있었다. 억지로 올려 웃어내던 입매는 더는 올라가 있지 않았고 절 향한 눈은, 그 시선은.
“...”
차마 더 깊게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검은 눈동자를 가까이 들여다봐 버리면 더는 저 자신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그깟 사랑한다는 말 평소처럼 쉬이 내뱉으면 되는데. 표주성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나 쉬운 말이었던가. 그는 늘 누군가가 제게 사랑을 원한다면 망설임 없이 바로 밋밋한 사랑 고백을 내뱉어줬다. 그건 허도연에게도 해당되었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그래, 되었어야만 하는데, 왜, 왜 입이 안 열리는 거지. 그깟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토해낼 수 없었다. 지금 도연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그와 쌓아온 수년간의 시간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결국 표주성은 허도연의 요구에 대답을 행했다. 본인의 비겁함을 인지하고 행한, 명백한 도망이었다. 제 마음 하나 간수 못 해, 상대의 혈관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비겁한 도망.
“...죄송합니다.”
“...아하하, 하하하하!”
떨군 고개 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연은 주성의 뺨을 매만지던 손을 힘없이 떨궈버렸다. 퉁퉁 부어 붉게 물든 손이 툭, 하고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도연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한껏 올려 웃었다. 새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소리 내 웃는 웃음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싸하기 그지없었다. 도연은 그대로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과 손에 굳은 피가 서로 닿아 거칠게 갈리듯 스쳤고 손가락 끝에 묻은 덜 마른 피는 혈색 없는 입술에 진득하게 묻어났다. 주성은 차마 고갤 들지 못했다.
그의 웃음이 제 등골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싸한 웃음임을 아는데도 이 빌어먹을 귀는 그 웃음이 미치도록 구슬프게 들려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돌아버린다고? 허, 뻔뻔하군. 이렇게 만든 이가 누구인가. 결국 표주성, 본인이다. 표주성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맴돈 생각에 제 어깨를 잘게 떨었다. 자신의 역겨움에 소름이 돋아 당장이라도 바닥에 얼굴을 박고 토악질을 해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식도가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다. 그러다 제 정수리 위에서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리는 낮은 목소리에, 주성의 타들어 갈 것만 같던 식도는 단숨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사랑해.”
“...”
“사랑해, 표주성.”
“...”
대답 없는 사랑고백이 방 안에 맴돌았다. 씨발. 도연은 자신의 사랑고백에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굳힌 주성을 보곤 짧은 욕설을 토해냈다. 그래, 알았어. 그리곤 대상을 알 수 없는 짧은 속삭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껏 굳은 주성은 떨군 제 시야에 보이던 허벅지가 시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질거리는 구두코가 유리재떨이의 파편을 짓밟으며 멀어진다. 규칙적인 굽소리는 점점 멀어지는가 하더니 그렇게 끊어질 것만 같은 문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텅 빈 방 안에 남은 건 여전히 제 후각을 내찌르는 피비린내와 지독한 정적뿐이었다.
“아...”
아무 말도 하다못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정신은 멍했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시야는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로 몰리는가 했던 피는 점점 아래로 쏠리더니 피 칠갑한 얼굴을 지나, 끓어오르는 것들로 가득 찬 식도를 지나, 답답해서 점점 조여오는 심장 부근에 맴돌았다. 왼쪽 가슴 주위에 누가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뜨거워서 고통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뭔갈 토해낼 것만 같던 식도에선 결국 쌉쌀한 노란 위액이 들끓듯 올라왔고 주성은 그대로 찢긴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혀끝까지 치민 위액에, 주성은 입을 크게 벌려 노란 위액과 거품을 토해냈다.
“우욱! 흐, 허억! 흐으...”
한 번 속을 게워내는 걸로는 만족이 안되는 지 수차례 속을 바닥에 게워낸 주성은 그제야 몰아치는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제 피로 굳어 뻣뻣한 손이 통증에 몸부림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대로 옆으로 엎어졌다. 분명 이미 앞은 보이지도 않는데 눈시울이 붉어지고 시야가 흐릿해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주성은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대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슴벅이는 눈꺼풀 아래론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떨어졌고 흘러간 자리는 제 찢긴 이마에 자리한 고통보다 더 격했다.
물론 절 감싼 그 어떤 고통보다도 아까 전, 제 뺨을 매만져주며 제게 사랑을 고백하던 여자의 얼굴만이 상상되었다. 비겁한 새끼라 차마 들여다보지도 못한 그 표정이 멋대로 제 머릿속에서 상상되어 절 찔러댔다. 어떤 표정이었을까. 화난 표정이었을까. 슬픈 표정이었을까. 아님 정말 같잖은 듯 비웃는 표정이었을 지도 모르지. 표주성은 제게 사랑을 고백한 이의 표정은 몰랐지만 다른 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살아오면서 셀 수도 없이 해온 비겁한 도망이라는 것과, 무너질까 두려웠던 건 그와 쌓아온 시간이 아닌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상대를 향한 추잡한 제 마음이라는 것과, 이걸로 자신이 허도연에게 세 번이나 상처를 줬다는 것까지.
먹먹한 귓가엔 이명이 점차 잦아들었고 울렁거리는 속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처박힌 뺨에선 아직도 그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기에, 주성은 그저 숨을 죽인 채 울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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