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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타입 샘플/B.기본 타입

1차 / GL

by JJH_ 2021. 5. 5.

 흔히 에메랄드빛 바다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한 색을 담은 눈동자에 빼곡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세라엘은 느릿한 깜빡임에 맞춰 책 속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읊어나갔다. 날이 참 좋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해는 높게 떠, 따스한 햇볕을 내리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흘끗 쳐다보거나 밖으로 나와 따스한 햇볕을 실컷 내리쬐었다. 간지러운 웃음소리들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라엘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라엘은 쇠로 만들어진 흰 의자에 앉아, 그저 절 지나치는 이들을 뒤로하고 낡은 책의 페이지를 느긋하게 넘겼다. 글자를 새기는 옅은 눈동자에 햇빛이 들어서질 못한다. 길게 늘어진 회갈색 빛의 머리카락만이 눈 부신 햇살을 모조리 삼켜내니.

그런 세라엘을 리엔시에는 짧은 호흡을 내뱉으며 큰 나무 뒤에 숨어 바라만 봤다.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기고 빛을 잃은 옅은 눈동자에 내쉰 호흡을 들이킨다. 옅은 분홍빛의 시선에 그가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오소소한 소름에 어깨가 잘게 떨리고 제 몸속에 들어찬 뜨거운 것이 휘저어지는 감각. 옅은 분홍색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간다. 위에서 옆으로, 옆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정면으로. 입술 사이로 내뱉는 숨결이 흥분에 달아오른다. 리엔시에는 제 시선의 끝에 있는 세라엘을 훑어보며 제 몸에 닿은 나무에 오른손을 얹었다.

갈라진 나무 사이로 긴 손가락들을 밀어 넣고 그것을 구부려 갈라진 나무를 꽉 쥔다. 성녀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 흥분에 온몸이 들썩인다. 저 사랑스러운 성녀를 갖기 위해선 제 모든 걸 지워야 한다. 그러니 닿지도 않는 그의 체취만을 상상하며 흥분에 젖어 들지 말아야 한다. 제 모든 습관과 몸짓을 천천히 지워나가려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던 리엔시에는 긴 호흡을 내쉬며 세라엘을 향해 다시 시선을 던졌다. 아무런 표정 없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숨만 내뱉으며 책을 읽는 모습이 황홀하다. 하지만 저 자신만 황홀하고 기뻐하고, 제 육신의 흥분에 뒤덮이는 것은 안 된다. 그러니 제 성녀에게도 나의 기쁨을 나눠줘야겠지.

리엔시에는 갈라진 나무 사이에 밀어 넣었던 제 손가락을 빼냈다. 흙과 나무의 잔가시들로 더럽혀진 손을 가볍게 털어낸다. 그러면서 세라엘에게 맞춰놓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주변을 훑는다. 뭔갈 신중하게 고르는 시선이 그의 한 손에 겨우 들어올 만한 큰 돌에 멈췄다. 다 털어내지 못한 흙이 묻은 손이 돌을 쥐고 갈색 단화를 신은 발이 어디론가로 향한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 가장 가까이 보이는 큰 문. 그리고 그 큰 문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큰 벽과 벽에 박힌 작은 창문들. 리엔시에는 천천히 검지를 치켜들고 창문을 하나하나 짚으며 숫자를 읊는다. 하나, 둘, 셋…… 열, 열하나, 열둘…….

매끄러운 입술이 짧게 맞닿아 떨어지며 규칙적으로 숫자를 내뱉는다. 한참을 까딱이던 리엔시에의 검지가 멈췄다. 쨍그랑! 리엔시에의 검지가 허공에 멈추자마자 뭔가 크게 깨지는 소리가 리엔시에의 귓가를 내리찍었다. 옅은 분홍빛 눈동자의 끝이 소리의 주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엔시에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돌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허공에 멈춘 검지는 소리의 주인을 향해 뻗어있다. 큰 스테인드 글라스에 구멍이 생기고 구멍 옆에 큰 균열이 가해져 있었다. 글라스 너머에선 높은 비명이 겹쳐 들리고 글라스를 둘러싼 큰 기둥 너머에선 둔탁한 쇳덩이와 대리석 바닥이 맞닿는 소리가 들린다.

리엔시에는 꽉 묶어둔 제 가슴께에 달린 리본을 흙 묻은 손으로 느슨하게 풀어헤친다. 짧은 숨결이 공기와 맞닿자, 리엔시에의 갈색 단화는 다시 느긋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 작은 행동으로 나의 성녀님이 조금이나마 기뻐하시길. 아니, 리엔시에가 아름다운 성녀님에게 걸맞은 존재에 더 가까워졌기를.

 

***

 

“성녀님. 누군가가 중앙 기도실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깨버려서 중앙 기도실에서 하실 기도를 개인 기도실에서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귓가에 내리 찍히는 소음이 지나고 24페이지가 31페이지까지 넘겨지자, 나무 십자가와 성경을 품에 안고 있는 수녀가 세라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느긋한 손이 다 식은 찻물이 담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세라엘은 제 앞에 선 수녀를 향해 고갤 끄덕였다. 세라엘의 끄덕임에 수녀는 자릴 떠났다. 수녀가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세라엘의 곁으로 전령들이 다가왔다. 제 어깨에 내려앉은 푸른 깃털의 전령이 제 귓가를 향해 속삭인다.

“성녀님, 그 애가 이번엔 그 큰 스테인드 글라스를 돌로 깨버렸어요!”
“근처 나무에서 쉬고 있는데 또 학교 빠져나와서 성녀님만 바라보다 갔어요.”

주황 깃털의 부리가 큰 전령도 제 손등에 내려앉아 속삭인다. 두 전령의 말에, 세라엘은 살짝 고갤 들어 신전 정원 중앙에 있는 큰 시곗바늘을 바라봤다. 곧 있음 세라엘의 기도 시간이었다. 세라엘의 옅은 눈동자가 수다스러운 전령들에게서 다 식은 찻물로, 제 허벅지 위에 올려진 책에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제 흰 손수건으로 천천히 굴러갔다.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는 아이가 제 앞에 섰다. 정확히는 제 앞에 선 것도, 제게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었겠지만. 상처 하나 없는 매끄러운 손가락의 끝이 흰 손수건에 닿아, 그대로 쭉 테이블 끝자락까지 손수건을 끌어당긴다.

절 기쁘게 하려는 아이의 형상을 떠올리니 긴 손가락이 안으로 저절로 구부려진다. 구부려진 손가락의 끝과 함께 손수건은 끌어당겨지고 그대로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다. 그 아이가 아직도 절 바라보고 있음에 확신에 찬 숨결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세라엘은 허벅지 위에 올려진 책을 들고 이젠 둘이서 대화나 하는 전령들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엘의 뒤로 테이블 위에서 쉴 틈 없이 부리를 움직이던 전령들의 물음이 들려온다.

“벌써 가시게요? 아직 기도 시간까지 좀 더 남으셨는데…….”

세라엘은 전령의 물음에 대답 대신 전령을 흘끗 바라보던 시선을 기도실로 옮겼다. 기도 시간까지 아직 남았다는 건 세라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리 일찍 일어난 건……. 그래, 확신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확신보단 완전한 확신이 제게 필요하다. 기도실로 향하는 갈색 샌들 아래에서 잔디가 쓸리는 가벼운 소리가 난다. 세라엘의 낮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에, 천천히 햇빛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허리가 저절로 제 시야에 들어찬 성녀를 따라 저절로 꼿꼿해진다. 잘못 보면 수십 개의 보석이 박힌 벽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그 너머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그 아래에 앉은 이를 가리킨다.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 살짝 숙어진 고개와 그 아래로 흘러내린 차분한 회갈색 빛 머리카락.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 씌워진 흰색 베일. 아주 살짝 열린 기도실 문 틈새로 보이는 그 모습에, 리엔시에의 몸은 잘게 떨리고 온몸이 뻣뻣해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누군가가 제 허리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 저절로 꼿꼿해지는 제 허리와 떨려오는 그 감각에 치켜들어진 턱. 리엔시에는 천천히 저만의 성녀를 바라보며 숨을 토해냈다.

그가 한결 편해 보인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이지만 알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제 성녀에게서 가장 가까운 아래에 있을 저니까. 어서 리엔시에가 세라엘이라는 고귀한 성녀에 걸맞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보다 그를 편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제 왼손에 들린 세라엘의 손수건에 시선을 고정한다. 오른손엔 깨진 스테인드 글라스 파편 하나. 손수건을 쥔 왼손은 가슴팍에 맞대고 파편이 들린 오른손은 주먹을 쥔다. 날카로운 파편에 손바닥이 파인다. 짙은 붉은 것이 맺히고 벌어지고 파편을 적신다. 흥분에 달궈진 것을 천천히 식힐 때쯤,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그 발소리를 리엔시에가 의식할 때쯤엔 이미 발소리의 주인은 리엔시에의 앞에 섰다. 짙은 쥐색 천을 뒤집어쓴 수녀 한 사람. 그 수녀가 건물 뒤편 벽에 기대있던 리엔시에 앞에 섰다. 중앙 기도실의 창을 깬 범인이 이 근처에 아직도 있을 거란 말에 근처를 둘러보던 수녀였다.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수녀가 마지막으로 온 곳은 성녀의 개인 기도실 맞은편 벽. 한 손엔 성경책 한 권, 목에는 길게 내빼진 십자가 목걸이 하나. 수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제 앞에 선 리엔시에를 훑는다.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트려지고 맞닿은 벽에 등과 함께 짓눌려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선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어딘가 이질적이다. 끝이 뾰족한 귀엔 푸른 보석이 박힌 십자가 귀걸이가 걸려있고, 왼손이 얹어진 가슴팍엔 금색 리본이 손 아래에 뭉개져 있다. 잘 다려진 셔츠 위엔 검은 조끼, 발목까지 덮는 짙은 남색 치마. 옅은 하늘색 셔츠 소매엔 오른손에서부터 퍼진 붉은 핏자국.

수녀는 절 나긋하게 내려다보는 눈빛과 저 옷을 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달라 보이는 옷. 저 옷은 본래 왕립 발데마인 상급 마법 학교의 교복일 것이다. ‘그’ 학교의 교복을 본인의 취향대로 개량하고 입고 다닐 사람. 그렇다면 저걸 입고 허릴 꼿꼿하게 피며 절 내려다보는 이는 유레이토. 공작가의 장녀, 리엔시에 솔린 유레이토. 모두가 아는 칭호를 사용해서 그를 표현하자면, 추락한 성녀의 추종자.

“무슨 용건이라고 있을까?”
“아, 아닙니다!”

수녀는 리엔시에의 물음에 다급하게 고갤 숙였다. 신전에 발을 들인 외부인, 비릿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 숙인 고개와 뻗어진 시선 끝에 닿은 그의 오른손 안의 보랏빛 파편. 수녀의 발이 점점 리엔시에에게서 멀어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가 아무리 제게 나긋하게 웃어 보인대도 그를 마주한 이상, 이젠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수녀에겐 누가 중앙 기도실의 창을 깼냐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언제든 꺾일 수 있는 제 목이 중요하다. 상대가 공작가의 장녀라면 일개 수녀가 할 수 있는 일 따위 있을 리가. 빠른 발소리가 제 귓가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리엔시에는 제 눈동자를 다시 성녀가 있는 곳으로 돌렸다. 느릿하게 울리던 심장박동이 다시 성녀를 들이키자마자 빠르게 뛴다. 한껏 일그러진 눈썹이 풀어지고 파편을 쥔 오른손에 좀 더 힘이 가해진다.

붉은 핏방울이 제 갈색 단화를 적신다. 제 시간을 방해한 수녀로 인해 헛되게 써버린 시간을 다시 주워 담듯, 리엔시에는 제 손에 들린 세라엘의 손수건에 코와 입술을 밀어붙였다. 숨을 크게 들이킬 때마다 제 몸속에 들어차는 성녀의 체취에, 리엔시에는 제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그에게서 원하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

 

차가운 네모난 나무 의자 하나, 정면의 큰 십자가 하나와 천장 가까이 벽을 둘러싼 스테인드 글라스. 세라엘은 코팅된 차가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평소라면 기도실의 문을 완전히 닫아놨겠지만 오늘은 아주 살짝, 제 모습의 일부만 보일 정도로만 열어둔다. 다리를 모으고 햇볕이 내리쬐는 방향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고갤 숙이니 제 차분한 머리카락과 베일이 내려앉고 제 뺨과 목을 간지럽힌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기억조차 안 나는 과거에서부터 외운 성경 구절을 떠올린다. 순간적으로 제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는 토악감을 그저 쭉 밀어내며.

또각

굽 소리. 높은 굽이라기보단 낮은 굽의 단화 소리. 세라엘은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숨을 들이켜고 그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평소처럼 문을 닫아놨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가 제게 다가오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춘다. 제 머릿속이 제멋대로 상상을 일으킨다. 세라엘의 허리가 의자의 등받이에 완전히 닿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꼿꼿하게 세워진다. 맞닿은 두 손의 끝자락에 힘이 가해지고 머금었던 숨이 뜨겁게 내뱉어진다. 성녀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품에 안고, 그 색 모를 눈동자에 성녀를 담아낼 것이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녀가 열어둔 문 틈새로 절 바라보며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들이켜고 내뱉을 것이다. 마치 지금 이 기도실에서 역겨운 성경이나 떠올리는 성녀처럼.

성경을 읊고 그 성경의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형상으로 구현시킨다. 신의 형상을 떠올리고 그것에 리엔시에를 덮어씌운다. 단지 그것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잘게 떨리고 눈썹이 절로 들썩여지려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가하며, 감히 성녀가 신을 배반했다는 배덕감과 함께 거짓된 형상을 제 머릿속에 주입한다. 리엔시에, 리엔시에…….

말 많은 전령들이 매일 낮마다 속삭이는 그 이름. 신전의 모든 이가 한 번쯤은 들었을 그 이름. 제 거짓된 가문인과 귀족들이라면 모두가 들어봤을 그 이름. 추락한 저만의 추종자 리엔시에. 매일 저만을 떠올리고 따라다니는 이름도 생김새도 모르는 이. 머리카락은 어떤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색일까. 절 따라다니고 떠올리며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말들을 토해낼까. 내게 원하는 것이 뭘까, 내게 듣고 싶은 말은 또 뭘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론 뜨거운 숨결이 토해내고, 제게 닿아있을 시선에 저릿한 감각을 진정시킨다. 몽롱한 감각이 뒤이어 밀려오고 시야가 흐려진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빛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어둠에 잠식됐다. 세라엘은 그 어둠에서 자신과 이름밖에 모르는 리엔시에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배치한다. 올라선 자신과 몸을 숙여 제 발 끝자락에나 입을 맞출 리엔시에를. 리엔시에의 형상을 향해 내려가는 시선과 함께 그가 원할 밀어를 머금는다. 천천히 머금은 것을 그의 귓가에 흘려보내는 상상을 하며, 세라엘의 손끝엔 점점 힘이 풀려나간다.

 

***

 

기도실의 창을 깬 범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신전엔 범인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뉘었지만 아는 자들은 이를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그럴 수밖에. 세라엘은 제 어깨를 스치고 긴 머리카락 사이를 넘나드는 전령들을 흘끗 쳐다봤다. 전령들은 늘 시답잖은 소문들을 풀어내다가도 꼭 끝자락엔 ‘그’에 대한 얘기를 제게 보고했다. 전령들이 제게 보고할 ‘그’는 단 한 사람뿐. 오늘도 세라엘은 제 스토커인 리엔시에의 하루를 전령들에게 보고받는다. 물론 이 보고는 직접적으로 이들에게 원한 적은 없었다. 그저 할 일 없이 수다나 떨어대길 좋아하는 몇 전령들이 먼저 말해줄 뿐. 기도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릿하다. 굽 없는 갈색 샌들의 움직임에 따라 차분한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어느새 기도실의 창은 모두 수리되었고 한동안 개인 기도실에서 그나마 자유를 짧게나마 느꼈었던 세라엘은 괜히 그날만이 떠올랐다. 리엔시에가 제게 자신을 의도치 않게 내어준 그 날을. 하지만 그날 이후로 리엔시에의 기척은 여전히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던 제 손수건과 유리 파편 하나와 같이. 사실 세라엘은 기도실의 창을 수리하던 이들의 대화의 일부를 어쩌다 주워들었었다. 기도실의 스테인드글라스 파편 중 하나가 모자란다고. 신성한 힘이 깃든 기도실의 파편이 어디론가 제 발로 사라졌을 리 없을 거라는 그런 대화를.

개인 기도실과는 달리 널찍한 차가운 나무 의자에 느릿한 몸짓과 함께 몸을 기댄다. 팔꿈치까지 감춰주는 수 놓인 흰색 베일이 살짝 숙어진 고개와 함께 아래로 늘어진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차가운 두 손을 모아 토악감이 밀려오는 목구멍에서 숨 쉬는 것보다 더 익숙한 기도문을 읊는다. 역겨운 신의 형상을 밀어낸다. 저만의 추종자를 떠올리고 그 형상을 밀어낸 신의 자리에 세워둔다. 분명 숨을 쉬고 들이켜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여겨져야 할 기도문이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세라엘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배반하는 아찔한 감각에, 세라엘은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리엔시에의 형상을 떠올렸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지독한 썩은 내가 난다. 살이 썩어든 시체 냄새와도 같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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