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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타입 샘플/키스

1차 / BL

by JJH_ 2021. 6. 1.

공기가 무겁다. 붕대로 압박된 배는 쓰라리고 제 손끝에 닿을까 말까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흰 손이 멀게 느껴진다. 살짝 축 내려앉은 어깨와 골반까지 덮인 얇은 흰 이불.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 그리고 저와의 시선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는 흰 눈동자. 연지는 제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링거 꽂은 제 손이나 쳐다보는 시라토를 바라봤다. 언제쯤 제대로 눈이 마주칠까. 절 앞에 두고도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 연지는 그 눈동자를 집요하게 바라보기만을 계속했다. 그가 먼저 절 불러주든 바라봐주든, 저와 눈이 마주치길 바라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시라토는 연지에겐 안 들릴 크기로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길 반복했다. 나름 병실에 들어오기 전, 호흡을 꽤 안정시키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호흡은 진작 진정됐는데 막상 그를 보니 호흡이 흐트러진 건가. 시라토는 미세하게 제 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영 우습기만 한 생각이 아니라 웃음이 나오질 않네. 시라토는 부하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생각들을 하며 달려왔다. 제 앞에 앉아 절 집요하게 바라만 보는 그가 위독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에서부터 시작된 생각. 아니다. 제 생각보다 좀 더 오래전부터 시작된 생각.

여전히 웃지 않는 낯이면서도, 이젠 제게 관심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제 고개가 틀어진 방향으로 고갤 숙이는 그를 향한 제 마음. 이에 대한 생각. 나는 그를 뭐하고 생각하고 대했던 걸까. 그저 조직간의 비즈니스적 관계? 어떠한 개인 목적을 위한 관계? 아님 그가 말한 연인 놀음을 하고 싶은 상대? 우습게도 이제껏 수많은 선택지 중, 마지막 선택지는 일부러 제 선택지에서 미뤄냈었다. 어떤 이유로 내가 그랬던 걸까. 그를 사랑한다는 제 감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스웠던 걸까, 아니면 절대 그럴 일 없는 완전한 동업자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를 사랑한다는 게 두렵고 나름대로 꽤 무서웠던 걸까. 뭐든 참 우습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어쩌겠어. 이젠 답을 알아버렸으니. 시라토는 절 따라 고갤 숙인 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옅은 주황색 눈동자가 그렇게 갈구하던 하얀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간다. 이상하게도 은근히 어울리는 흰 병원복을 입은 그의 다리에서 고개와 함께 살짝 숙어진 상체로. 숙어진 상체와 함께 벌어진 병원복 속 흰 붕대에서 절 갈구하는 눈동자로. 시라토는 제 손과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손끝에 힘이 가해졌는지 이불 주름이 안으로 밀려들어 가버린 그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따스한 손이 제 손에 닿자, 뻣뻣한 제 입술이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시라토는 그에게 머뭇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를 향한, 우연지를 향한 제 마음에 대한 대답을.

“네가 동업자가 아닌, 다른 의미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 주면 좋겠어.”

순간적으로 틀어진 고개와 그제야 맞닿은 시선. 닿고 싶어도 닿질 못했던 그 손이 제 손을 감싸고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를 내어준다. 연지는 시라토의 말에 한참을 굳어있었다. 그리 한참 굳어만 있지는 않았지만, 시라토의 체감상 적어도 30분은 그가 말이 없던 걸로 느껴졌다. 엇갈린 숨결이 한 열 번은 맞닿았다 스며들기 반복하자, 그 숨결을 가르고 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딘가 끝이 떨려오는 듯한, 조금 낮은 목소리.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짙은 눈썹을 한껏 일그러트린 연지가 물었다. 일그러진 눈썹과 어째 끝이 잘게 떨려버린 질문, 여전히 웃지 못하는 낯. 연지는 시라토의 말에 당장 웃을 수 없었다. 확신이 필요하다. 그가 제게 말한 것이 절 향한 사랑 고백이 맞다는 확신. 당장이라도 제 앞에 앉은 이를 끌어안고 얼굴 붙잡고 입을 맞추든 그의 고백에 답을 해주며 저답지 못한 낯부끄러운 말들이나 내뱉고 싶으니까. 만약 절 향한 이것이 사랑 고백이 아니라면 나름 괴로울 것만 같으니까. 연지는 제 오른손을 뻗어, 그의 목에 얹었다. 그리곤 그 상태로 그를 끌어당겨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댔다. 드르륵. 시라토가 앉은 의자가 연지의 힘에 끌려 침대에 바짝 붙었다.

갑작스레 맞닿은 입술에 놀란 시라토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론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고 연지는 그 숨결을 천천히 들이키며 그의 아랫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부드러운 입술에 끝이 뭉툭한 이부터 날카로운 이까지, 꾹꾹. 짓누르는 듯하면서도 아프지 않게 눌러댄다. 제 아랫입술을 머금고 이로 짓눌러대는 연지 덕에 시라토는 저절로 제 입술 사이로 연지의 윗입술이 물렸다. 연지가 시라토에게 파고들수록 시라토의 입술은 점점 벌어졌고, 연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더 깊이 파고들었다. 느릿한 혀가 시라토의 치열을 훑는다. 그의 연한 살을 눌러대고 타액으로 젖은 그의 혀를 이리저리 굴려댄다.

제 목에 얹어졌던 큰 손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고 맞닿은 두 손은 그의 의도된 손짓에 따라 저절로 깍지가 끼워진다. 제게 관심을 갈구하던 눈동자는 여전히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게 깊이 파고든다. 참 웃기다. 연지를 못 본다고 생각하고서야 자각된 제 마음이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제게 깊이 파고들고 싶어서 안달 난 듯한 그의 키스가 부드러워 그에게 녹아든다. 시라토는 제 입술과 연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가는 질척한 소리와 함께 탄성과도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하, 아……!”

진득한 타액이 떨어지는 입술과 함께 늘어진다.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를 것으로 젖어 든 입술이 시라토의 입술에서 턱선을 타고 내려갔고, 그대로 그의 목젖을 쓸고 검은 기모노의 틈을 벌려 쇄골에 깊게 파고든다. 입술이 뭉개지는 듯한 부드럽고 질척한 감각이 생생하다. 시라토는 제 허릴 한 손으로 꽉 껴안은 그의 팔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엔 저절로 힘이 가해지고 그의 단단한 팔이 닿는 허리가 꼿꼿해진다. 뭉툭한 이가 닿았다 떨어지더니 다시 날카로운 이가 닿는다. 제 살을 파고드는가 하면 여전히 부드럽게 끝만 짓누르며 입술이나 질척하게 맞닿았다 떨어트린다. 한껏 찌푸려진 시라토의 눈썹이 한순간에 힘 풀리듯 풀어졌다.

시라토는 자연스레 연지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러운 병원복이 타액으로 젖은 입술에 젖어 든다. 제 입술 사이로 또다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올까 봐, 시라토는 그의 어깨에 제 입술을 뭉갰다. 당장이라도 저 병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올 것만 같으니까. 연지는 제 몸짓에 따라 제게 파고들고 입술을 묻는 시라토의 행동에, 저절로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의문은 확신으로 변한 지 오래였지만, 조그만 더. 제 의심을 빌미로 그에게 달라붙는다. 그의 흐트러진 기모노 사이로 제 큰 손을 집어넣고, 그 안을 헤집는다. 얇은 기모노에 연지의 손 모양이 그대로 떠진다. 그의 손이 어디에서 어디를 쓸어내리는지, 어딜 집요하게 누르고 주무르고 간질이는지.

시라토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저절로 시선을 그의 등에 고정했다. 제 몸보다 늘 따스한 그 손이 절 쓸어내린다. 뻣뻣한 허리를 쓸어내리고 저릿한 감각으로 움찔거리는 아랫배를 짓누르고, 굳어버린 듯한 제 옆구리를 매만져준다. 그의 손짓에 따라 벌어졌다 접히는 것을 반복하는 기모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제 살갗을 자극했다. 제 귓불을 머금은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한껏 젖은 혀가 절 집어삼킨다. 뜨거운 숨결이 제 귓가를 간질이고 온몸으로 퍼지던 저릿한 감각이 제 아랫배에 몰려든다. 연지는 깍지를 낀 제 손과 그의 허리를 받치는 팔을 잡은 시라토의 손에 힘이 가해지자, 흐트러진 제 숨결과 함께 그를 타일렀다.

“숨 쉬어요…… 천천히.”
“흐, 읏, 하아…….”

가쁜 호흡이 연지의 어깨에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그의 어깨의 입술과 코를 박고 숨을 토해낸다. 그런 시라토의 등을 연지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토닥임과 쓸어내림에 맞춰 가쁜 호흡을 다 토해낸 시라토가 그제야 그의 품에서 상체를 내뺐다. 절 바라보는 눈동자가 부드럽다. 짙은 눈썹은 한껏 내려가고 입꼬리는 그와 반대로 올라가있다. 어째 평소보다 두 볼과 귓불, 목이 붉은 연지. 시라토는 그런 그의 뺨에 제 차가운 손을 얹고 물었다. 나름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어디 아픈가?”

그의 진지한 표정과 질문에, 그저 그를 향해 기쁨의 미소나 한껏 날리던 연지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오늘 제게 와서 한 말을 나열해보자니 참 웃기다. 진지한 얼굴로 사랑 고백이나 해대더니 이번엔 제게 아프냐는 질문까지. 연지의 웃음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한 시라토는, 갑자기 제 품에 안겨 웃음을 토해내는 연지를 바라봤다. 진짜 아픈가 해서 물어본 건데. 마침 배에 구멍 생겨서 입원한 환자니까. 한참을 웃어댄 연지는 여전히 입꼬릴 한껏 올린 채로 고갤 틀었다. 그의 어깨에선 안 떨어지고 고개만 틀어 그를 올려다보며. 한 손은 여전히 그와 깍지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론 그를 품에 안은 채.

“있잖아요.”
“저 배 뚫린 거 아직도 아파요. 그래서 그런데 전 못 움직이니까 제 위에 올라와 주면 안 돼요?”

진지한 시라토의 질문에 연지도 진지하게 질문했다. 진짜 진지하다. 그에겐 이 문제는 아주 중요했기에, 시라토를 향해 나름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갑자기 제 품에 안겨 실컷 웃어대더니 이번엔 제게 이상한 눈빛이나 보내며 뭐? 뭘 해달라고? 시라토는 절 향해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연지를 바라봤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 눈빛에 연지는 자연스레 그에게서 얼굴을 떼어내려 했지만, 시라토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이 연지의 입술을 잡아당긴다. 그리곤 가볍게 흔들어대며 그가 아파죽지 않을 만큼만 꽉 눌렀다.

“주둥이가 살아있는 걸 보니 죽지는 않겠군.”

연지가 정말 큰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나, 애초에 그의 몸에 큰 이상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달려왔더니 참 멀쩡하다. 누가 저 말을 칼에 배 뚫린 놈이 하겠어. 시라토는 제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연지의 입술을 잡은 손을 떼어냈다.

“상처 아물면 해줄 테니까 쉬기나 해.”
“앗, 정말요? 저 빨리 밥 먹고 잘래요.”

어서 상처 아물어야 하니까. 연지의 말에 시라토는 헛웃음이 섞인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제 손에 깍지를 낀 그의 손을 느릿하게 떼어내며. 할 일이 많아 이만 가겠다는 시라토에게 입술이 얼얼한 연지가 아쉬운 눈빛을 보낸다. 그렇다고 그를 잡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을 자신이 받아들였으니 그와 자신은 이제 그 시시할 거라던 연인놀음이라도 할 관계니까. 근데, 내가 대답을 했던가? 어, 안 했다. 입꼬릴 한껏 올려 웃으며 병실을 나가는 시라토에게 손을 흔들던 연지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시라토는 이미 병실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도 알아주셨을 거야. 얼른 밥 먹고 자고 연락이나 기다려야지. 시라토가 제 마음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연지는 굳게 믿으며, 시라토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곧 올 밥이나 기다렸다. 어서 시라토에게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며.



연지는 입원하는 일주일간 시라토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라토는 연지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았지만, 일이 너무 쌓여버리는 바람에 일주일간 연지에게 연락을 안 했다. 연지는 일주일간 속상하고 심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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