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7개월. 네가 보낸 수십장의 사진과 자석, 편지를 습관처럼 정리한다. 어느 사진엔 사람 하나 집어삼킬 법한 눈보라 가운데 서 있는 단발의 네가 있고 또 어느 사진에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 나시 하나 입고 머리를 위로 올려묶은 네가 있다. 예쁜 담벼락 옆에서 딸기 스무디 하나 든 채로 웃고 있는 너와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아무 벤치 위에 앉아 축 늘어진 너까지. 한 손으로 다 쥐어지지 않는 사진과 자석들을 네모난 하얀 상자 안에 고이 넣어두고 그 옆엔 그보다 더 많고 두꺼운 편지들을 끼워 넣는다. 너와 떨어지고 너의 손을 맞잡지 못한지가 어느새 1년 7개월이 지났다. 의도치 않게 너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생겨버렸고 잔잔하게 울리던 심장이 조금은 더 빠르게, 그렇다고 소란스럽지 않게 울리기 시작했다.
정연은 하얀 상자를 다시 나무 향 물씬 나는 옷장 아래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말린 생화와 잎들을 직접 으깨 만든 물감과 풀 향이 한껏 풍겨오는 캔버스를 해가 잘 드는 창가로 밀어붙였다. 도화지 같은 새하얀 티 하나와 아슬아슬하게 무릎을 덮지 못하는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손목엔 너의 이니셜을 새긴 나무 팔찌를 꼈다. 정연은 한참 동안 창가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뜨거운 햇살을 기꺼이 받아냈다. 팔찌를 낀 왼손은 근처 화단에서 가져온 꽃 한 송이를 매만지며 말이다. 약속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은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멍하니 그 작은 공간을 맴돌던 다리가 이제야 다른 곳으로 이탈하였다.
정연은 쿵쿵 울리는 마음에 향수를 뿌리진 않았다. 1년 7개월이 지났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퐁실한 섬유유연제 향과 산뜻한 푸른 향만이 맴돌았다. 길게 쭉 뻗은 흰 손가락이 한참 꽃잎을 매만지고 빛 한껏 머금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의도적인 시간이 지나고 정연은 제게 향을 나눠준 꽃을 다시 새하얀 캔버스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새하얀 상자 안에 있을 어느 한 사진 속 손문구를 되새기며 말이다.
***
시끄러운 말소리와 가게 전체를 채우는 잔 두들기는 소리가 정연의 귓가를 내리찍었다. 이런 술집, 이렇게 많은 인원과 자리는 정연에겐 꽤 오랜만이었기에 소리가 소음으로 변하긴 아주 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리 힘들기만 하지는 않았다. 소음은 소음일 뿐, 즐거움과 잔잔하게 요동치는 울림은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술집에 들어온 정연은 자신들의 일행이 어디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창회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가 생각나지 않는가. 세월이 흘러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달라진 친구들과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재회와 함께 술을 들이켜는 곳.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정연은 여전히 익숙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친구들에게 가벼운 손 인사를 했다.
술병은 점점 테이블을 넘어 바닥까지 차지하기 시작했고 많은 인원이 있는 테이블들엔 빈 접시와 먹다 만 안주 접시로 가득했다. 정연은 친구들이 넘겨주는 잔 몇 잔만 적당히 들이켰다. 쇠 이쑤시개로 과일들만 주구장창 주워 먹으며 자꾸만 채워지는 잔을 지겹게 바라만 봤다. 기다리던 이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한껏 즐기던 이들의 몇몇은 테이블을 떠나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 설렘을 감춘 목소리로 동창회에 가겠느냐는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건넨 목소리가 귓가에 먹먹하게 울린다. 그래, 일이 생겨서 못 올 수도 있지. 애초에 딴 지역에 있었는데 갑작스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게 더 힘들잖아. 머리도 마음도 이해하지만 괜히 새어 나오는 아쉬움은 여전했다. 과일과 술을 머금은 입이 비워지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 어딘가 탄식과도 비슷한 숨을.
“내가 오자마자 한숨을 쉬네.”
익숙한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와 잡음을 뚫고 제 귓속에 내리 찍혔다. 습관적으로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자연스레 내려가며 고개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내 옆에 네가 앉아있다. 마지막으로 네가 보냈던 사진 속의 모습처럼 살짝 더 길어진 중단발을 한 네가 내 옆에 앉아있다. 언젠가 네가 내게 말했던 그 바람과도 같은 미소와 함께. 한껏 따스해진 어느 유월의 바닷바람과도 같은 미소로 너의 이름을 내뱉는다.
“랑아.”
***
스치듯 맞닿는 어깨와 팔, 부드러운 천이 새삼스레 간지럽다. 술잔을 기울고 두들길 때마다 닿는 손가락은 온몸에 저릿한 감각을 넘겨줬고 새 술병이나 안주를 가져올 때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선 익숙한 샴푸 향이 술 냄새와 뒤섞여 풍겨왔다. 각자 따른 술잔을 함께 두 번, 세 번, 네 번. 어느새 열 번 정도 두들기고 나니 남은 건 얼마 남지 않은 인원과 새벽을 달리는 시곗바늘뿐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취기까지. 뒤늦게 참석한 랑과는 달리 점점 귓바퀴가 붉게 물들여지기 시작한 정연은 그저 조용히 웃음과 함께 과일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속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정연을 바라보던 랑은 제 잔에 채워진 마지막 술을 입안에 가볍게 털어 넣으며 정연의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한껏 가까워진 입술이 정연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가자.”
스치듯 맞닿던 팔이 완전히 달라붙고 미지근한 술잔만을 매만지던 미지근한 손이 취기에 달아오른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랑은 의자 옆에 뒀던 자신의 가방을 어깨에 걸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술에 취해 정신조차 못 차리는 동창들을 뒤로 한 채, 자신에게 기꺼이 이끌려오는 정연의 손목만을 아프지 않게 쥐며 술집을 나섰다.
***
“정신이 좀 드나 보네.”
“...조금?”
“원래 술을 좋아했나?”
“그래 보여?”
“아니, 딱히.”
“오늘이 최고 기록이긴 해.”
웃음기 가득한 다정한 말투는 소다 맛 아이스크림과 함께 흘러내렸고 어딘가 툭툭 내뱉는 묘한 말투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과 함께 흘러내렸다. 안에만 있을 땐 마냥 더운 날씨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선선하게 잘 부는 날씨였다. 공기는 마냥 텁텁하거나 묵직하지 않았고 바람 또한 후덥지근한 바람이 아닌 선선하게 땀을 식혀줄 그런 바람. 랑은 그런 바람에 자신을 맡긴 채 차갑게 식은 벤치에 앉아 정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절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입 안 가득 퍼지는 단내보다 더 달달하다.
“제주도는 어땠어?”
“고기가 맛있었어. 귤도.”
“전주도 갔었다며. 한옥마을 쪽으로.”
“비빔밥은 맛없더라. 떡볶이가 맛있었어. 떡갈비도.”
“마라도는 언제 갔었지?”
“저번 달에. 짜장면이 맛있었어. 궁중 짜장.”
“랑아, 먹으러 다닌 거야?”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맛은 있더라고.”
“네가 잘 먹고 다녔다니 다행이야.”
1년 7개월간 매일 빠지지 않고 문자와 전화를 했었다. 그럼에도 얼굴 보며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기에,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새벽 담벼락 아래의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든 채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랑이가 어딜 다녀왔는지, 그곳에서 어떤 글을 쓰고 어떤 걸 봤는지, 정연은 그동안 어떤 그림을 그려왔고 새로 심었다던 화단의 새 꽃은 어떤 향이 났는지 등등. 이미 한 번은 들었던 서로의 근황을 몇 번이고 되묻고 들으며 두 사람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느릿하게 베어 물었다. 먼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랑은 덩그러니 제 왼손에 남아버린 나무 막대기나 만지작거리며 정연에게 물었다.
“걱정은.”
담담하게 내뱉는 말의 끝이 묘하게 올라갔다. 희미한 물음표가 정연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절 향해 틀어진 몸과 제게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바라보는 두 눈동자, 제게 말할 때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달한 딸기향. 그 향은 생각보다 중독성이 강했다. 취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겨우 빠져나오려던 날 단숨에 빠트려버렸으니. 그러니 어떻게 내가 이 취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어. 정연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구차한 변명을 속으로 되새겼다. 취기에 빠져든 이 순간만 가능한 구차한 변명을.
“걱정 안 했어. 넌 뭘 해도 그 누구보다 잘할 걸 아니까.”
다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을 쥔 손으로 벤치의 끝자락을 짚는다. 상체는 느릿하게 숙어지고 고개는 자연스레 옆으로 비틀렸다. 아주 살짝, 벌어져 있던 두 입술은 맞닿자마자 서로의 자리를 찾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 사이로 소다 향과 딸기향, 그리고 그 향들에 파묻힌 희미한 알콜 향까지. 두 혀가 미끄러질수록 뒤섞인 향은 더 진하게 풍겨왔다. 정연의 오른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떨어져 있던 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곤 천천히 그의 허리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닿는 것조차 떨리는 듯, 아주 부드럽고 천천히.
그럴 만도 하지. 그토록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던 이를 이제야 만났는데. 마치 처음 저 눈동자를 맞이했던 순간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런 마음은 랑에게까지 온전히 닿았는지, 아님 랑마저도 그런 감정이었는지, 랑은 살며시 두 팔을 정연의 어깨에 올리고 목을 감싸 안았다. 딸기향 물씬 나는 입술이 정연의 아랫입술을 앙 물었다. 여전히 제게서 눈 한 번 피하지 않고 마주친 그 상태로.
“나도 안 했어.”
“왜?”
“너도 그 누구보다 잘하고 있을 걸 아니까.”
두 혀가 진득하게 꼬인다. 타액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가 입술을 충분히 적셨고, 랑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정연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어댔다. 제 입술이 물어뜯기는 것마저 좋은지, 한없이 입꼬릴 올려 웃던 정연은 제 입술을 물어대느라 다시 다물어진 랑의 입술을 제 혀로 가볍게 훑었다. 소다 향이 진득하게 묻어난 혀가 두 입술을 파고든다. 혀끝이 가지런한 치열을 훑는가 싶으면 입안의 연한 살을 문질렀고 또다시 치열을 훑어내는가 싶으면 이번엔 천장을 간지럽힌다. 절 간질이는 혀에 랑은 정연의 목을 감싼 팔에 조금씩 힘을 주며 자신의 쪽으로 그를 쭉 끌어당겼다.
비틀린 고개와 입술 사이론 알콜 향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 흣...”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은 점점 얇은 흰 티 사이로 들어갔다. 랑은 아주 귀여운 자만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지도 만지지도 못한지가 오래됐어도 그의 손은 여전히 기억한다고. 그 자만은 맞으면서도, 또 어느 부분에선 틀렸다. 그의 손에선 여전히 초록 향이 풍겨왔고 부드럽고 길쭉한 손끝은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다만 어딘가 더 커진 듯한 그의 손과 제 얇은 옷 위로 도드라진 그의 손 모양은 어딘가 어색했다. 물론 그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정연의 손끝이 느긋하게 랑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가 이끄는 손끝엔 초록 향이 산뜻하게 묻어났고 향은 허리에서부터 옆구리, 아랫배, 윗배, 갈비뼈까지. 어루만져 주듯 쓸어내리는 손길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이 끈적하게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그사이를 맺는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끊기길 반복했다. 숨결은 여전히 알콜 향을 내뱉었고 입술과 혀가 타액과 함께 미끄러질 때마다 차마 누군가가 들으면 오해할 법한 낯부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연은 이젠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땅바닥에 흘려보내며 랑의 눈을 바라봤다. 제 입술에서부터 턱선, 목젖, 쇄골까지. 그 누구보다 더 느릿하고 느긋하게 입을 맞춰주면서도 절 끝까지 올려다보는 은은한 눈동자를.
“...그래도 조금은 걱정하긴 했어.”
“그 눈보라에 파묻히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 말하는 건가.”
“사실 그것도 했긴 해. 밥은 잘 챙겨 먹으면서 다니나, 어디 다치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들.”
“나도 걱정했어.”
“어디 안 다쳤을까, 그런 걱정?”
“아니,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줘야 하나.”
랑의 시선이 벤치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정연의 아이스크림으로 향했다. 반 정도밖에 안 먹은 아이스크림은 그리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닌데 어느새 다 녹아버렸고 정연의 손엔 소다 향만 한껏 머금은 나무 막대기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정연은 자신의 막대기와 랑의 사뭇 진지한 눈빛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그의 옷 안에 간질이듯 들어가 있던 제 손을 빼내어 두 팔로 제 품 안의 이를 한껏 끌어안았다. 또다시 절 다시 마주했을 때의 웃음을 지어내며.
“이번엔 내가 사줄게.”
“아이스크림 대신 스무디로 사줘.”
“집에서 만들어줄까?”
“가는 길에 딸기 사가자.”
“좋아, 랑아.”
갑자기 자신을 한껏 끌어안는 정연의 몸에 랑은 어색하게 허공에 뻗어져 있던 자신의 팔을 정리했다. 그를 따라 그의 등에 제 양팔을 올리고 두 손은 그의 어깨 위에 얹으며, 소리 없이 입꼬릴 올려 웃었다. 제 이름을 툭 하면 설레듯 부르는 이의 이름을 덤덤한 척 내뱉으며. 나도 보고 싶었어.
정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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