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 GL
잠에서 깬 새벽, 문득 창밖이 궁금해졌다. 올해는 눈이 늦게 온다지. 작년엔 11월 초부터 눈 오고 난리였는데 올해는 조금 늦게 찾아온단다. 절 끌어안은 우악스러운 두 팔을 떼어내고 화장실에 갔다. 그다음엔 정수기에서 물 한 잔 따라 마시고, 또 그다음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쭉쭉 빗었다. 공기가 차가워 눈가에 붙어있던 졸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방에 들어오니 절 무슨 죽부인처럼 끌어안던 자세 그대로 널브러진 은재가 보였다. 내가 무슨 자기 죽부인도 아니고.
그 널브러진 자세가 괜히 웃겨, 추운지 미간을 찌푸린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다 커튼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고 창밖을 봤다. 밖엔 언제부턴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눈이 꽤 쌓여있었다. 첫눈이다. 시계를 보자니 새벽 5시였다. 곧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라 공기가 파랬다. 두 손바닥을 창문에 대고 눈 구경을 했다. 매년 보는 눈인데도 그게 그렇게 좋았다. 바닥은 보일러를 틀어 따끈한데 살갗에 닿은 공기는 찼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와 손을 대면 얼어붙을 것처럼 시린 창문은 죽을 때까지 질릴 일 없겠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허리까지 이불이 내려간 은재가 뒤척이는 소리였다. 창문에서 손을 떼고 이불을 끌어올려 주려는데 뒤척이던 몸이 순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고갤 돌려 보니, 헝클어져 엉망인 머리카락을 한 은재가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주며 물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깬 거야? 이불도 덮어주고 얼굴의 반을 뒤덮은 머리카락도 귀 뒤로 넘겨주는데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언니 설마 눈 뜨고 자나. 은재는 여전히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침대에 올라 머리카락을 계속 빗듯 풀어줬다. 잠이 덜 깼나. 평소라면 지금쯤 춥다면서 어디 다녀왔냐며 절 끌어안고 온갖 난리를 칠 차례인데 오늘은 얌전히 절 올려다보기만 했다. 쌍꺼풀 없이 매끈한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한참을 그러더니 갑자기 아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을 벌렸다. 잠에 취해 평소보다 더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왜 자다 깨도 예쁘냐. 잡아먹고 싶게.”
속눈썹이 느릿하게 끔뻑이는 눈꺼풀과 함께 움직였다. 은재의 말끝으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연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은재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은재는 그런 연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게 퍽 진지해 보이는 게 이상했다. 뭐야, 왜 저래. 진짜. 연하는 괜히 은재의 볼을 툭툭 건드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목이 뜨거웠다. 식은땀도 안 나는데 더웠다.
“애기야.”
절 부르는 목소리에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다 겨우 대답했다. 응?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절 올려다보는 시선은 풀린 듯 나른한데 여전히 미간은 찌푸려져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 뒤진다, 진짜.”
그 말끝으로 시야가 내려앉았다. 이후 제 시야에 들어찬 건 얇은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쇄골과 목이었다. 닿을 듯 말 듯 떨어진 코끝에서 익숙한 살냄새가 풍겨왔다.
“내가 말했지. 일어나면 모닝 뽀뽀 꼭 하라고.”
지금이 모닝이냐고. 은재의 품에 어중간한 자세로 파묻힌 연하가 헛웃음을 토해냈다.
“언니, 지금이 어딜 봐서 모닝이야.”
“해가 안 떴어도 일어나면 뽀뽀하라고. 어? 엉?”
제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일부러 힘을 가하며 대답을 유도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잠에 취해 그을리듯 낮았다. 연하는 강제로 은재의 쇄골에 얼굴이 처박혀 입술이고 코고 다 뭉개져 웅얼거렸다.
“아니, 흐어버, 물 좀 마식호, 오그언, 아 좀!”
결국 팔을 뻗어 은재의 등을 마구 쳐댔다. 그만 눌러대, 진짜. 등을 쳐대는 손길이 마냥 세지만은 않았다. 은재는 그 손길이 마치 간지럽다는 듯 입꼬릴 올려 웃었다. 귀엽게 생겨선 때리는 힘도 귀엽다. 은재는 자신의 품에 얼굴이 처박혀 웅얼거리는 연하를 풀어줬다. 푸하, 하고 숨을 토해내는 연하에게 쳐다보며 베개에 얼굴의 반을 묻었다. 묵언의 협박처럼 아무 말 없이 절 내려다봤다. 은근히 자신의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듯 고갤 까딱이면서.
“언니, 턱선 자랑하는 거야?”
“장난하냐. 내가 왜 턱선을 자랑해. 자랑 안 해도 이미 다 멋진 거 아는데.”
“왜 저럴까, 진짜.”
“내가 진짜 5초 준다. 5, 4, 3... 반. 반의반. 반의반의…….”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애기야, 빡돌게 하지 마라.”
이 정도면 많이 놀렸다. 연하는 은재 놀리기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을 웃음을 참다 결국 실실 웃으며 은재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계속 고갤 까딱이며 안달 나 있던 은재가 뭔가 마음에는 드는데 성에는 안 찬다는 듯 입꼬릴 내렸다. 왜 이리 까탈스럽담. 기어코 입술에도 짧게 뽀뽀해주자 입꼬릴 샐쭉 올려 웃었다.
“이제 됐지? 나 눈 구경 좀 더 하자.”
연하가 창가로 가려고 상체를 일으키자, 마치 오뚜기 인형처럼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살짝 들었던 상체와 머리가 허공에서 매트리스로 추락하듯 처박혔다. 연하는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줄 기미도 없이 누워있는 은재를 올려다봤다. 이내 다시 그의 품에 파묻히듯 끌어안겼다.
“나 추워. 존나 춥다, 진짜.”
“아니, 나 눈 구경...”
“아이고, 나 동상 걸리면 김연하 누가 먹여 살리냐.”
“저는 어엿한 성인이므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입 다물어. 발 치워라. 이불 덮어주게.”
은재는 귀찮은지 발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연하는 예... 하고 대충 대답해주며 다리를 들어줬다. 은재의 어깨까지 두꺼운 이불이 덮였다. 그러니까 연하의 머리까지.
“이게 뭐 하는 걸까요.”
“아 뭐야, 너무 작아서 안 보이나 했네.”
“뭐라는 거야, 진짜.”
은재에게 한없이 작은 연하가 악에 받쳐 뭐라 말하려고 하자, 은재는 그대로 연하의 얼굴을 다시 자신의 가슴팍에 처박아버렸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알았어. 진정해봐라 좀. 은재는 뭐가 그리 웃긴 지 실실 웃으며 이불을 연하의 목까지 내려줬다. 그리곤 생색내듯 말했다.
“내가 진짜 이렇게 매너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놈의 시끼는 언제 알지?”
“우우웁, 읍!”
“어어, 그래. 고맙다고? 세상에, 고마우니까 이불을 좀 내려준 대신 네 체온을 넘겨주겠다고? 그럼 사양하진 않을게.”
“미쳤, 으으웁!”
연하가 가까스로 미쳤, 까지만 말했지만 다시 큰 손이 제 뒷머리를 잡고 자신의 가슴팍에 처박아버렸다. 뭉개진 콧속으로 저와 같은 바디워시 향과 살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한참을 발악하던 연하는 결국 포기하고 은재의 옆구리에 팔을 감았다. 등을 쓸어주듯 토닥여주자, 그게 뭐가 좋은지 눈을 감은 은재가 키득거렸다.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제 머리를 꾹꾹 누르던 손은 어느새 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서로를 한참이나 토닥여주듯 쓰다듬다 어느샌가 두 손은 멈췄다. 쇄골 쪽에 닿은 은재의 아랫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들썩였다. 자는 게 분명하다. 연하는 살며시 절 끌어안은 두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달싹였다. 눈 구경 마저 해야지.
“야, 자라. 진짜 잡아먹기 전에.”
“...넵.”
...아침에 봐도 늦지 않겠지? 응응, 그렇지. 김은재에게서 벗어나려던 김연하의 계획은 그렇게 수포가 되었고 얼마 안 지나 두 가슴이 일정한 박자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공기는 차가운데 파묻힌 품이 따스해 전혀 겨울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