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타입 샘플/B.기본 타입

쩜오디(킬미힐미) / HL

JJH_ 2021. 12. 5. 15:07

한동안 비는커녕 아주 화창한 날씨일 거라고 기상예보에서 그랬다. 본래 기상예보는 입벌구라 하였거늘. 입만 벌리면 구라. 리진은 세기와 함께 보이는 아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작년부터 운영하지 않는 5층짜리 학원 건물이었다. 리진은 유리문 앞에 서 있으려고 했다. 척 봐도 건물 문은 굳게 닫혀 있으니까.

 

그런데 제 뒤에 서 있던 세기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열어버렸다. 문에서 빠득, 하고 뭔가 끌리는 소리까지 나는 걸 보니 잠겨있긴 했으나 자물쇠가 거의 풀리기 직전이었나보다. 비에 홀딱 젖은 세기는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들어가.”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에 리진은 어이가 없었다. 세기의 팔을 마구 쳐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미쳤어? 남의 건물 문을 왜 부숴!”

“부수긴 누가 부숴. 원래 열려있었어.”

 

야 이 뻔뻔한 놈아. 리진은 제 발끝에 덜렁 널브러진 박살 난 자물쇠를 툭툭 쳤다. 이건 뭔데. 그건 나약한 것. 미쳤나 봐. 빨리 들어가. 춥다며 제 등을 마구 밀었다. 리진은 결국 세기의 손에 떠밀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발끝에 닿아있던 자물쇠는 몰래 구석으로 휙 밀어버렸다. 그래, 쟤가 무슨 헐크도 아니고 부순 건 아니겠지. 원래 녹슬어서 그런 걸 거야.

 

자기합리화를 하며 멀뚱히 서있자니 세기가 다가왔다. 그리곤 제 옆에 같이 멀뚱히 섰다. 고갤 들어 올려보니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본인이 지금 얼마나 불만스러운지 최대한 표정으로 나타내보세요, 라고 시켜도 저 정도로 티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세기는 밖에서 추적추적 내리다 못해 아주 누구 하나 죽일 듯 퍼붓는 비를 노려봤다. 한껏 올렸던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이마 위로 축 늘어졌다. 입술은 앙다물고 입꼬리는 축 내렸는데, 솔직히 말해서 산책하러 못 가서 심통 난 강아지 같았다.

 

“뭐.”

“왜 나한테 성질이야, 성질은.”

 

리진이 세기를 빤히 올려다보니 세기가 인상을 구겼다. 구경났어? 기분이 어지간히 안 좋아졌는지 아까 그 비 오기 전의 화사한 강아지 같은 표정은 없었다. 리진은 괜히 세기의 등을 쓸어주며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 넌 산책하러 못 가서 속상한 강아지다.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흠뻑 젖은 빨간 코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 군. 비가 오는 게 그렇게 속상해?”

 

리진이 제 등을 쓸어주는 게 나쁘진 않은지 세기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내가 분명 봤어. 오늘부터 내일까지 비는커녕 단 1초의 소나기도 지나가지 않을 거라고.”

 

그래, 나도 봤어. 네가 내 앞에서 어제 아침부터 자기 직전까지 주입했잖아. 내일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둘이서만 산책을 어떻게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무슨 눈높이 수학 선생님도 아니고. 리진은 살다 살다 성인이 된 후로 그렇게까지 주입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 이것도 소나기일 거야. 곧 그치겠지.”

“내 꼴을 봐.”

 

세기가 미간을 마구 찌푸리며 리진을 향해 자신의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핏줄 선 손등 위로 물이 줄줄 흘렀다. 이후로 세기는 계속 리진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 잘난 얼굴이 지금 이 꼬라지가 됐는데 뭐라 뭐라. 한껏 빼입은 이 명품이 얼만데 중얼중얼. 리진은 살며시 자신의 양 귀를 문질렀다. 지금 흐르는 게 혹여 빗물이 아니라 핏물일까 봐. 가뜩이나 평소에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찡얼거리는데 오늘따라 더 하다. 또 이상한 짓을 꾸몄는데 계획대로 안 돼서 심통 난 게 분명하다.

 

“지금 몇 분이 지났는지 알아? 30분이야, 30분! 30분이나 지났는데 이게 과연 네 말대로 소나기가 맞...”

 

리진은 세기의 입술을 축축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입, 입, 입! 그리곤 당황한 듯 주춤한 세기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리진의 힘에 강제로 문밖으로 몸이 내빼진 세기가 뭔가 불안해진 듯 입을 열려고 했다. 더는 내 귀에 이 이상의 시련을 내려줄 순 없었다. 리진은 달렸다. 세기가 또 입을 열려고 하려는 순간, 그의 손목을 힘껏 쥐고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건물과 집의 거리는 꽤 가까웠다는 거다. 리진은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고갤 틀었다. 뒤에는 산책하러 못 가서 심통 난 강아지가 아니라 강제로 목욕하고 나온 고양이가 있었다. 물기가 수건으로 덜 닦인. 아니, 좀 많이 안 닦인. 리진은 그 모습에 최대한 입술을 입안으로 쑤셔 넣고 이로 짓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눈알도 열심히 굴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기의 축 내려앉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넘겨줬다. 무슨 커튼이 짜라란, 하고 열리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치워지자마자 보이는 건 해탈한 듯 멍하게 리진만 내려다보는 세기의 눈이었다.

 

아, 이건 좀. 풉, 하고 참지 못한 리진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래놓고 세기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어이없다는 듯 뚝뚝 끊어서 웃는데 본인이 생각해도 지금 꼴이 우습기는 한 지 몇 번 웃고 웃지 못했다. 숨넘어갈 듯 웃으며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리진을 차마 떼지도 못하고 젖은 머리카락만 계속 쓸어올렸다. 웃음이 나오냐며 뭐라 하면서도 자신의 어깨에 기댄 리진을 떼려는 노력조차 안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리진이 먼저 숨을 가다듬으며 세기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얼굴에 물기가 대단했다.

 

“이게 웃겨?”

“왜, 재밌었잖아. 안 그래?”

 

리진이 여전히 투덜대는 세기의 팔을 툭 쳤다. 자, 어서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으세요. 평소와 달리 양말까지 젖어, 양말을 벗고 맨발로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세기가 괜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자, 리진이 뒤를 돌아봐 주며 다시 입꼬릴 올려 웃어줬다. 진짜 재미없었어? 그 물음에 세기는 허, 하고 헛웃음을 토해냈다. 재미없었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대답 대신 입술을 쭉 내밀고 먼저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리진은 그런 세기를 보며 똑같이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겨, 정말.

 

 

 

수건으로 대충 얼굴과 몸을 닦고 아무 옷이나 주워입고 나왔다. 거실에 있나 싶어서 내려갔더니 리진은 부엌에 있었다. 달달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샌데 이거. 세기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오니 리진이 먼저 아는 체 했다. 다 갈아입었냐는 물음에 세기는 대충 고갤 끄덕이며 리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머리를 수건으로 짜기라도 했는지 살짝 끝이 굳어 축축해 보였다. 늘 하던 리본 핀은 뺐는지 이마를 훤히 내놓던 옆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자, 맛있겠지?”

 

리진이 갑자기 웬 컵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갈색 물 같은 게 있었다. 살짝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이게 뭔지 세기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 코코아구나. 방금 막 탔는지 컵은 손잡이를 제외하고 뜨거워서 잡기도 힘들었다. 리진은 어깨에 하얀 수건 하나 걸치고 자기 몫의 컵을 들었다. 그리곤 먼저 소파에 앉았다. 눈만 끔뻑이며 바라보고 있자니 리진이 고갤 틀어 절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왜 이리 굼떠. 어서 안 앉고 뭐 해.”

 

그러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다 혀가 뎄는지 아뜨뜨, 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기는 그 모습에 헛웃음처럼 허, 하고 웃으며 리진의 옆에 앉았다. 최대한 달라붙듯 가까이 앉았다. 뭐야, 왜 이렇게 붙으셔. 리진은 살짝 옆으로 떨어졌다. 추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며 따라붙었다. 난 더워. 난 추워. 아니, 이러시는 이유가. 내가 춥다니까? 결국 리진의 골반이 소파 손잡이에 닿았다. 강제로 양옆에 가둬진 셈이 됐다. 세기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릴 씰룩이며 잔에 입술을 댔다. 여전히 코코아는 뜨거웠다.

 

“머리는 안 닦고 나온 거야?”

 

조용히 등받이에 기대 코코아를 홀짝이던 리진이 물었다. 세기는 그 말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짝 털어줬다. 리진의 얼굴에 물기가 튀었다.

 

“아!”

 

얼굴을 마구 찌푸리며 어깨에 걸쳐뒀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 반응이 꽤 재밌다는 듯 세기는 입꼬릴 또 올려 웃었다. 리진은 얼굴을 막 닦다, 세기의 어깨를 흘끗 쳐다봤다. 진짜 아예 안 닦았나 보네. 니트 하나 입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목이고 이어진 어깨고 물줄기가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하여간 뭐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코코아를 탁자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히 코코아를 홀짝이던 세기가 절 노려보듯 올려다봤다.

 

“어디 가. 다시 앉아.”

“뭐래, 머리 말려주려고 일어난 거거든?”

 

리진이 절 노려보는 세기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던지듯 놓았다. 뭐 하는 거냐고 신경질 부리는 세기를 무시하고 소파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수건을 치우려는 듯 머릴 흔드는 세기를 잡았다. 고개가 자유분방하시네요, 손님. 수건과 함께 머리를 잡고 억지로 고갤 숙이게 했다. 그러다 컵에 살짝 앞니와 입술이 부딪혔는지 숙인 고개 아래에서 뭐라 뭐라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렸다. 리진은 그런 세기가 이젠 익숙하다는 듯 어어, 그래, 어어. 거리며 가볍게 무시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기 시작했다. 어릴 때 리온에게 몇 번 해줘서인지 능숙했다.

 

계속 뭐라 웅얼거리며 짜증 내던 세기도 점점 움직임이 멎었다. 어느새 둘밖에 없는 거실에선 수건과 머리카락이 적당한 속도로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중간중간 세기가 코코아를 홀짝이는 소리도. 세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털어주는 손길을 기꺼이 받았다. 오히려 좋았다. 리진이 쓰던 수건에선 리진의 냄새가 났다.

 

그래봤자 같은 바디워시에 같은 샴푸였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았다. 제 몸에서 나는 향과 똑같은 게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털어주다 손목이 뻐근한지 리진의 손이 멈췄다. 수건은 소파 등받이에 대충 걸어두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세기는 기꺼이 자신의 옆에 어서 도로 앉으라는 듯 고갯짓했다. 코코아를 홀짝이며 그러는 모습이 퍽 웃겼다.

 

“코코아 맛있지?”

 

리진이 다 식은 자신의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었다. 세기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대답했다.

 

“맹맹해.”

“그게 무슨 소리죠? 이렇게 단데.”

 

리진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 없다 했다. 세기는 그 말에 고갤 살짝 기울였다. 거의 다 마른 머리카락에선 더는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고갤 앞으로 내뺐다. 리진의 두 손에 들린 머그잔에 입술을 댔다. 한 손으로 컵을 살짝 기울여 리진의 코코아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저보다 높아진 리진을 올려다보며 괜히 활짝 웃어줬다.

 

“그러네. 다네.”

 

리진은 그런 세기를 한참 내려다봤다. 멍하니 몇 초 정도. 그러다 절 올려다보는 세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짝, 하고 살과 살이 맞닿는 작은 소리가 났다. 아! 아프진 않을 텐데 세기는 엄살을 부리듯 이마를 부여잡으며 리진을 노려봤다. 뭐 하는 거야! 그 말이 안 들린다는 듯 리진은 고갤 내저었다. 나는 몰라요, 몰라. 제게 계속 뭐라 말하는 이의 반대편으로 고갤 돌렸다.

 

리진은 자신의 입술과 세기의 입술이 함께 닿은 부분을 피해 컵에 입술을 댔다. 조금 전, 절 올려다보는 세기의 얼굴이 괜히 떠올랐다. 왜 그렇게 웃어, 진짜. 옆에선 여전히 세기가 리진을 향해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진은 그 말을 무시하며 컵을 살짝 기울였다. 창밖으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느릿하게 코코아가 목을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틈 하나 없이 닿는 골반이 뜨겁게 달아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