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H_ 2021. 10. 5. 20:18

신의 조형물에 붉은 눈동자가 비쳤을 때, 나는 심장이 관통하는 듯한 극통을 느꼈다. 누군가가 날카로운 것으로 심장 표면을 긁어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널 뭐라 비유하는 게 맞는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신의 왼쪽 가슴에 비친 붉은 눈동자는 마치 보석 같았다. 밀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귓바퀴는 날이 무딘 장식용 칼 같았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보이는 희미한 얼굴은 마치 명화 한 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보석, 무딘 장식용 칼, 명화. 그 어떤 비유로도 널 완벽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어깨부터 목까지 둘러싼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성스러운 묵주로 일곱 번은 뒤 감겨 묶인 것만 같았다. 숨을 내뱉는 것마저 조심스러울 정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오로지 신의 조형물에 비친 널 바라보았다.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네가 내게 형상화가 되는 이 순간을, 나는 이 육신이 썩어 문드러질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을, 양팔을 자비로이 벌린 신의 조형물 앞에서 깨달았다.

 

 

 

*???서 ???장 7절 中

 

 

 

봄바람에 꽃가루 하나 뒤섞이지 않은 날이었다. 세라엘은 머리카락 끝에 묶인 검은 리본을 엄지와 검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아무도 없는 대신전 정원을 거닐었다. 샌들 사이로는 풀잎이 스쳐서 갔고 해는 점점 땅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하늘은 붉어지고 내리는 빛마저 느슨해지겠지. 그때가 되면 세라엘은 평소처럼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커다란 십자가 앞에서 머릴 숙일 것이다. 다섯 번의 기도마저 끝내면 해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겠지. 달이 뜨고 공기는 차가워질 테고, 다시 해가 떠오르는 내일이 되면 널 만날 수 있을까.

 

세라엘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고갤 치켜들었다. 긴 머리카락으로 덮여있던 목과 어깨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이마를 덮었던 회갈색 머리카락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나의 스토커를 떠올린다. 다급하게 뛰어가던 뒷모습 딱 한 번. 세라엘은 그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저 또한 신을 모시는 성녀이기 전에 인간임을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은 무슨 색일까,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향이 날까. 내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어서 해가 떠서 네가 날 찾아와주길. 내일은 겁먹지 말고 좀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주길.

 

세라엘은 자신의 샌들 아래에 짓밟힌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줄기는 찌그러져 즙이 새어 나왔고 잎은 샌들 밑바닥 모양이 선명하게 펴져 있었다.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좋은 옷, 좋은 가문, 안정된 삶. 고작 학교 친구들과 잘 사귀지 못해 혼자 다니는 가여운 모습. 그들을 피해 매일같이 저 너머에서 날 몰래 훔쳐보는 모습. 그 무엇도 세라엘이 직접 본 것은 없었다. 오직 매일같이 내게 날아와 너에 대해 속삭여주던 정령들의 말뿐이었다. 나는 고작 그 말들과 네가 남긴 작은 흔적들만으로 너를 상상했다. 분명 처음엔 우습기만 했는데 어느샌가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짐과 동시에 네가 가진 것들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널 온전히 증오하는 것도, 시기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참 애매한 감정이었다.

 

 

세라엘은 해가 뜨자마자 제 발로 독방에 들어갔다. 작은 독방 안에는 한 벽면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와 큰 십자가, 매일 아침 수녀들이 닦아 광이 나는 신의 조형물, 낡은 나무 의자뿐이었다. 세라엘은 차가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고 신의 형상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기도가 아닌 딴생각을 했다. 세라엘이 하는 딴생각의 대부분은 리엔시에가 차지했다.

 

가증스러운 나의 추종자. 사랑스럽도록 여린 스토커. 발칙한 사랑꾼. 세라엘은 어느새 신의 형상이 아닌 리엔시에의 형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선 너머에 선 제겐 다가오지 않는 리엔시에의 시선이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상상만으로도 허리에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그 자극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결국 너도 나의 껍데기를 스쳐 가듯 사랑하는 걸까.

 

끼이익.

답답함에 완전히 닫지 않은 독방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였다.

신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네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너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감히 신의 너른 가슴 위에 내려앉은 너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네가 선 너머의 내게 다가왔다. 그 희열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세라엘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익숙한 듯 두 손을 모아, 나와 같은 기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곤 고갤 숙이면서도 눈꺼풀은 숙이지 않았다. 신의 심장이 날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그 모습에 심장이 멈춘 듯 온몸의 피가 그 자리에서 굳는 느낌을 받았다. 뜨겁게 들끓던 피가 차갑게 식더니 그 자리에 고여버린 것만 같았다.

 

세라엘은 스테인드글라스에 옅게 비친 리엔시에의 얼굴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누구에게 기도했던 것인지. 신의 형상에 리엔시에를 씌우고 절 위한 기도를 했었다. 그가 원하는 밀어는 무엇일까. 말만 해준다면 친히 제 아래에 두고 양껏 속삭여줄 텐데. 실은 리엔시에가 제게 그런 밀어를 원할 만큼 껍데기가 아닌 추락하는 절 온전히 원했으면 한 게 아닐까. 리엔시에가 시간이 흐르면 대체될 수 있는 49번째 성녀의 육신이 아닌 세라엘이라는 정신을 사랑하길 바랐다.

 

발치에 떨어져 있던 묵주가 발목을 감싸고 종아리를 감쌌다. 그다음엔 허벅지, 허리, 가슴, 목. 이윽고 제 머리를 조이듯 절 뒤 감았다. 세라엘은 리엔시에를 향한 기도의 자세를 풀었다. 그가 제 껍데기만을 사랑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기어코 내가 널 가지게 된다면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으리라. 세라엘은 마치 옆으로 꺾인 것처럼 시큰해진 발목을 세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천천히 절 숭배하는 이를 향해 두 손을 살며시 벌리며 몸을 돌렸다. 때마침 내려오는 햇빛에 세라엘의 등 뒤로 색색의 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자비로이 벌어진 품 안에선 썩어 문드러진 시체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