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 HL
-널 보자마자 느꼈어. 우린 운명이라고. 내가 널 평생을 바쳐 사랑하리라고.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날 향해 웃어주는 게, 고작 그게 미치도록 좋았어.
그깟 운명이 뭐길래 사람들은 고작 그 두 글자에 인생을 바칠까. 정말 그게 뭐라고. 여루는 한참이나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다 상체를 일으켰다. 에어컨 바람으로 차갑게 식은 소파는 여루의 살이 닿은 부분만 미지근하게 달아있었다.
불 하나 안 켠 넓은 거실의 빛이라곤 소파 맞은편에 놓인 커다란 티비의 빛뿐이었다. 화면에선 명작이라 불리는 오래된 로맨스 영화가 틀어져 있었다. 분명 옛날엔 이 영화 좋아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학교 다닐 때면 늘 그렇지 않은가. 방학 일주일 전이면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간 과목은 종종 수업 대신 영화를 틀어줬었지. 대부분의 선생은 주로 싸고 나온 지 오래된 영화를 틀어줬었다. 학생들의 반은 영화에 집중하고 반은 친구들끼리 수다나 떨었었다. 여루는 그중 영화에 집중한 쪽이었다.
영화가 재밌다든지 수다 떠는 걸 싫어한다든지,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평소라면 시끄러웠을 교실이 그날만 되면 커튼도 치고 불을 꺼 짙은 남색으로 가라앉은 것도, 잔잔하게 퍼지는 영화 배경음과 대사 소리도, 그 소리에 살짝 파묻힌 속삭이는 말소리도, 시원하게 맴도는 에어컨 바람도.
그 자유롭고 아늑하면서도 시원한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에 영화에 집중했었다. 그러니 이 오래된 영화는 선생님들이 몇 번이나 틀어줬기에 결말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 결말이 여루가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였다.
-네 미래에 내가 당당히 있고 싶어. 나와 결혼해줘.
-나도, 나도 널 너무, 사랑해. 네 미래에 내가 있고 싶어...
-...너 지금 우는 거야?
-아, 아니거든! 그, 그으... 반지나... 끼워줘.
-아하하하. 아닌 척하기는. 그만 울어, 네가 너무 울어버리면 나 마음 아-
띡-
엔딩까지 얼마 안 남은 영화가 화면의 빛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나마 어두운 거실을 비추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남은 건 어둠에 익숙해진 진한 주홍색 눈동자와 에어컨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뿐이었다. 주홍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갔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곗바늘은 어느새 새벽 2시를 넘겼다. 아까 채주현 방에서 나온 게 1시 20분이었나. 40분은 더 넘게 여기에 있었네.
여루는 굳게 닫힌 채주현의 방문을 흘끗 쳐다봤다. 채주현은 장마가 시작되면 가끔 잘 때 에어컨을 틀었다. 습하게 가라앉는 공기가 은근 찝찝했기에 그랬다. 그는 에어컨 온도는 대부분 조금 낮게 설정해두고 여루를 끌어안고 잤다. 그가 언젠가 말하길, 이렇게 하면 공기는 차가운데 네 체온 덕에 따뜻하다고. 그러니 잘 땐 떨어지지 말라고. 서로 체온이 없으면 둘 다 감기 걸리고 고생만 한다고. 참, 뭣 같은 논리지 않은가.
그럼에도 여루는 주현의 그 뭣 같은 논리에 평소와는 달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렇게 껴안고 잘 때면 늘 주현은 여루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자연스레 두 귀를 막아줬다. 상대의 숨소리도 창에 부딪히는 거센 빗소리도 에어컨의 미세한 소리도. 그 무엇도 안 들리는 게 당장은 편했다. 빌어먹을 빗소리가 제 귀에 내리꽂히면, 가끔 잠을 이루기 힘들었으니까.
채주현과 채주현의 방도 죽도록 싫어하면서 이상하게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밤에는 차라리 그렇게 귀를 틀어막아서라도 잠을 잘 수 있는 게 나았다. 어차피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채주현은 늘 먼저 일어나 눈앞에 없으니까. 그렇기에 여루는 그 부분에 대해선 별다른 반박을 입에 달지 않았다. 그저 채주현과 권여루간의 암묵적인 거래 같은 거라 생각하며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안정적일 것만 같은 그 거래는 아주 가끔 제게만 불리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제 숨소리만 들림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그래서 여루는 아까 먼저 잠든 주현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처음엔 물을 마시려고 나왔지만 막상 나오니 방에 다시 들어가기도 이 적막한 거실에 홀로 있기에도 싫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가지가지 하네. 그런 여루가 선택 한 건 겨우 거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트는 것이었다. 아주 잠시만. 이 갑갑한 속이 조금이라도 게워질 동안만 이러고 있자, 했었는데. 영화 중반부에 켜진 티비는 엔딩에 다다르고서야 꺼졌다.
“...이제 자자.”
짧은 정적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두운 거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치는 것보단 차라리 채주현의 손을 빌려 잠시라도 잠을 잘 수 있는 편이 나았으니까. 여루는 제 체온에 미지근해진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영화를 흘겨보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들을 밀어 넣으며 쓸어내렸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절 끌어안고 자던 자세 그대로 잠든 채주현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늘 잘 정돈되어 있던 검은 머리카락은 옆으로 누워 그 자세를 따라 살며시 옆으로 흐르듯 헝클어져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으며 들썩이는 그의 가슴과 등은 한없이 나른해 보였다.
때마침 에어컨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들어왔다. 은은하게 펼쳐진 기다란 달빛은 깔끔한 침대맡과 새하얀 시트를 지나 텅 빈 주현의 손을 비췄다. 원래라면 저 길게 펼쳐진 팔 위에 제 머리를 대고 저 손이 제 귀를 막아줬겠지. 채주현의 손은 참 신기하다. 그저 멀리서 보면 별다른 것 없이 꽤 큰 손이라고만 느껴지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면 손이 크다기보단 전체적으로 긴 편이다.
큰 굴곡 없이 이어진 손가락은 마치 관리를 받은 손처럼 매끈했다. 악기를 다룬 사람의 손처럼 길고 마디뼈가 얇았다. 손톱은 늘 메이크업을 받으며 관리도 함께 받았는지 잘 정돈되어 있었고. 그가 그런 손으로 절 만질 때면 마치 그게 이질적인 무언가가 절 쓸어내리는 것만 같아서 늘 저절로 어깨가 잘게 떨렸다.
“다음부턴 물 마시러 가지 말아야겠어.”
제 앞에 누워있는 사람을 의식한 작은 목소리였다. 희고 매끄러운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생겼다. 여루는 살며시 제 입매를 뒤틀며 인상을 지었다. 다시 자려면 저 품에 내 발로 들어가 내 손으로 저 팔에 안겨야 한다니. 어딘가 답답하게 조여오던 심장이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더 격하게 짓눌리듯 숨이 안 쉬어졌다.
빌어먹을. 차라리 다시 거실로 가서 티비나 틀고 밤을 새우든가 해야지. 다른 날처럼 잠결이나 몽롱한 정신으로 하는 것도 아닌 지금처럼 제정신일 때 그딴 짓을 할 바엔 차라리 혀를 깨물고나 말 것이다. 여루는 겨우 정돈했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다시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 순간,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갑게 식은 제 손목에 무언가가 닿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에어컨 바람에 차게 식은 채주현의 손이었다.
***
사람들은 사랑이나 미신에 열광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그랬다. 신입생들은 낡은 교과 창고 근처만 지나가면 늘 수군거렸다. 여기서 예전에 누가 죽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야자 시간만 되면 이 근처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봄에는 어느 복도에서 마주친 선배가 저와 운명 같다고 속닥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여름엔 어디 삼류 공포 영화 클리셰를 끌어모은 괴담들이 돌아다녔다. 그래도 가을과 겨울엔 미신이 덜 돌아다녔다. 가을엔 정시와 원서로 죽어가는 학생들의 곡소리가 돌아다녔다. 겨울엔 수시를 망친 학생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내도록 들렸다.
권여루는 그런 것들을 믿던 사람이었을까. 확실한 건 채주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얘기를 들고 제 옆자리로 와 떠들던 놈들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만큼 시시하고 유치한 게 더 있을까, 채주현은 생각했었다. 정확히는 권여루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채주현은 권여루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절 바라보며 사랑이니 운명이니 운운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한심했다. 그러면서도 때론 궁금했다. 그게 과연 어떤 느낌일지, 그들의 일상에 자리한 사랑이나 운명이 제겐 어떻게 작용할지. 그렇게 품은 사랑은 생각보다 더 강렬했다.
절 빈틈없이 채워버린 사랑은 한없이 아늑하면서도 끝없이 흘러내렸다. 살면서 그가 잡지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또, 완전하게 그의 손안에 있지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그것은 권여루였다. 결국 채주현은 권여루에게 서툴렀다. 그에게 사랑이란 ‘권여루’ 그 자체이니까. 오로지 권여루만을 향한 한정된 것이니까.
“...뭐?”
주현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가졌다. 신적인 존재도, 여든 먹은 노인도 아니다. 그래서 여루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아득해졌다. 누군가 제 뇌에 독한 향수를 들이붓는 듯한 아득함 속에서 늘 헤엄쳤다. 그는 그 아득함 속에서도 바보 천지가 아니었기에, 여루가 절 사랑하지 않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을 꽤 하찮은 장애물이라 생각하면서도 제 시선은 그 장애물을 쉬이 놓아주질 못했다.
권여루가 저만큼이나 절 사랑해주길 바랐다. 마치 태양 그 자체인 것만 같은 밝은 눈동자 속에 제 육신이 가둬져 재가 되길 바랐다. 고막이 내려앉을 것처럼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저만큼이나 제 이름만을 다정히 불러주길 바랐다. 저만큼이나 절 사랑하길 바랐고 저만큼이나 절 깊이 안아주길 바랐다. 권여루라는 인간에게 채주현이란 인간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길. 그저 그만큼을 채주현은 바랐었다. 그래서 네 입으로 듣고 싶었다.
“날 사랑하지, 여루야.”
제게 활짝 웃어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권여루를 듣고, 보고, 느끼고 싶었다.
***
토기가 몰려왔다. 제 가슴께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단숨에 식도를 치고 올라왔다. 여루는 그것을 있는 힘껏 저 아래로 밀어냈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토기를 밀어내면서도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미간은 점점 찌푸려졌다. 입꼬리는 몇 번의 경련 끝에 틀어졌고 콧잔등엔 미세한 주름이 졌다. 명백한 증오였다.
“...뭐?”
부아가 치밀었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어버리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피가 몰려 뜨겁게 팽팽 도는 제 머리를 저 자신마저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날 사랑하냐고.”
“아니. 그 전에.”
너는 사람을 참 비참하게 잘 만들었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난 잘못하지 않았어. 이거?”
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절 올려다보는 게 싫다. 평소보다 더 나긋하면서도 덜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싫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내리깐 눈꺼풀이, 제 손목을 마치 소중한 것을 쥔 것처럼 부드럽게 쥔 차가운 손이.
“...나, 잘못했어?”
잠결에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미친 듯이 싫었다. 진심으로 자신이 잘못했느냐고 묻는 잠긴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차라리 제정신일 때 말해주지.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권여루는 채주현의 한 마디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하늘이었다. 뭔갈 쥐지도 닿지도 걷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하늘이었다. 육신은 바닥을 기었지만 정신은 하늘을 떠다녔다. 여루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이 상황과 모든 감정이, 사실은 자신이 잘못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만들어낸 원동력의 주된 연료일 뿐. 사실은 정말 그렇지 않다고 여루는 매일 밤 수없이 되새겼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은 저조차도 일으켜 세우지 못할 정도로 무너질 때면 생각했었다. 채주현은 절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로지 자신의 오기와 뒤틀린 욕망을 채워내기 위해 절 이용하는 거라고. 그러니 언젠가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면, 그때가 된다면 채주현 또한 절 놓아주겠노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 순간부터 존재치 못할 생각이 되어버렸다.
“내가 뭘 잘못했어? 말해줘, 여루야.”
“...아.”
“내가 고칠게. 그러니까 날 사랑해줘.”
“...”
“사랑한다고 말해줘.”
채주현은 권여루를 사랑한다. 어디 모자람 없이 빈틈없이 권여루만을 사랑한다. 권여루의 사랑만을 갈급해 하는 애절한 사랑을 지녔다. 절 한순간의 놀잇감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주현의 양팔이 허공으로 뻗어졌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식은 두 팔이 여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루는 아무런 저항 없이 주현의 움직임에 응해줬다. 풀썩, 하는 얇은 여름 시트에 무게가 더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루는 주현의 옆에 앉혀졌다. 주현은 그런 여루의 무릎을 베었다. 두 팔은 여전히 여루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은 아랫배에 깊게 묻은 채로.
“나 미워해도 돼.”
눈가에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마치 울음이 터져 나올 것처럼 피가 몰려 뜨거운데.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 난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감정을 품든, 어떤 행동을 하든 널 사랑해. 여루 너라면 다 좋으니까.”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축 가라앉았다. 심장이 일부러 모든 혈액을 눈가로 몰아 보내는 것만 같았다. 눈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뜨거웠고, 고통스러웠다. 목구멍까지 치민 울음이 내벽에 달라붙어 버렸다. 차라리 토해내고 싶은데 쏟아지기는커녕 제 몸에 스며들어버렸다. 숨은 턱턱 막히고 얼굴 근육은 경련하듯 뒤틀렸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든, 무언가가 우리를 만나게 했든. 결국 우리는 이어질 관계였고, 사랑할 관계였어. 알지?”
여루는 살며시 고갤 떨궜다. 떨군 시선 끝에는 제 배에 얼굴을 묻은 채주현이 보였다. 잠긴 목소리가 묻혀 더 낮게 들렸다. 여루는 다시 고갤 들어 달빛이 일렁이는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네가 날 사랑해주면 더 좋을 것 같아.”
사랑해. 마지막 말이 삼켜졌다. 맴도는 정적을 깨는 이는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어 내린 몸이 닿아 아주 따뜻하게도 아닌, 미지근하게 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채주현은 권여루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권여루는 채주현의 표정도, 자신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을 감은 여루는 기도했다. 다음 장마엔 채주현의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달라고. 있지도 않을, 있어도 제 삶을 구원해주지도 않을 주께 빌었다.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