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H_ 2021. 5. 5. 00:13


“오늘 날씨 좋다더니 곧 비 오겠는데?”
“아, 망했네. 그런 거 있잖아. 입학실날에 비 오면 재수 없다 했던가?”
“그런 걸 믿어?”
“아니, 워낙 이 학교에 약간 이런 괴담이나 소문 같은 게 많아서 그렇지.
“참나, 그런 것 좀 그만 믿어라. 애도 아니고.”

어딘가 찝찝한 슬리퍼 위 흰 양말과 차가우면서도 곧 비가 오려는지 눅눅하게 젖어 든 공기. 원래 이 학교 체육관은 전등이 약한 편인가? 날이 워낙 흐려서인지 사람으로 가득 찬 큰 체육관의 등은 어째 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원하던 학교에서 떨어지고 집에서 버스로 일곱 정거장이나 거쳐야 하는 학교로 배정된 라베는 사람으로 가득 찬 체육관을 쭉 둘러봤다. 큰 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한참을 대화하느라 줄을 엉망으로 선 앞의 학생 두 명에서 체육관 문밖에서 신입생들을 구경하는 선배들로. 대화 소리와 의자, 마이크 등을 옮기느라 소음으로 가득 찬 체육관을 빙 둘러본다. 그러다 어색한 제 교복으로 시선이 멈췄다.

와, 드디어 그 이상한 교복에서 탈출이야. 라베는 자신의 몸을 감싼 교복과 중학교 때 교복을 동시에 떠올려봤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싫은지 가만히 있질 못하던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넥타이 하나 없던 교복에서 크고 예쁜 리본 달린 교복이라니. 원하던 학교에서 떨어진 애치곤 오히려 들떠 보이는 모습. 어찌 됐든 이 학교도 거리가 좀 더 멀 뿐이지 교복도 예쁘고 체육관도 이렇게 크니 된 거지. 라베는 괜히 보이지도 않는 장점을 열심히 끄집어내며 자신의 가슴팍에 단정히 묶인 리본을 매만졌다. 여기저기서 대화 소리만이 가득했다. 뒤에선 아까 오는 길에 마주친 선배가 너무 예뻤다며 감탄을 했고 앞에선 여전히 이 학교의 수많은 괴담과 소문을 주고받았다. 물론 친한 친구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배정되어 아는 이 하나 없는 라베에게 대화를 걸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저 지루한 교장의 연설이나 들을 라베는 아니었다. 라베는 자신의 옆에 선. 그러니까 대충 아마 옆 반으로 배정된 것 같은 애에게 고갤 내밀었다. 그 큰 금안을 당황스레 절 쳐다보는 이에게 고정한 채로.

“안녕! 난 라베 키르헤야. 1학년 3반이고 참고로 난 지금 친구가 없어. 이렇게 말하니까 좀 친구 하나 없는 애 같은데 맞아. 그러니까 나랑 친구 할래?”

본인이 말해놓고 뭔가 이상했는지 라베는 미세하게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음, 망했군. 라베는 이미 자신의 첫 인사가 망해버렸다는 걸 알았는지 어색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진 않았다. 인사가 망해도 받아줄 애는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라베는 절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를 쳐다봤다. 몇 초간의 정적. 정적 끝에 나온 것은 짧은 웃음이었다.

“누가 그렇게 인사해. 너 진짜 웃기다.”
“웃겼다면 다행이야. 내가 생각해도 이 인사는 좀 무리였던 것 같아. 그래도 받아주네?”
“뭔가 너 안 받아줘도 계속 질척거릴 것 같이 생겨서.”
“그렇게 생긴 건 또 뭐야. 사실 그런 소리 많이 듣긴 했어. 물론 그러려고도 했고. 사람 좀 잘 본다, 너.”

어색하게 굳어있던 라베의 미간이 웃음과 함께 단숨에 풀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수였던 인사를 받아주곤 먼저 이름을 말해주는 애에게 라베 또한 자신의 이름부터 해서 전 학교는 어디였는지, 어쩌다 여기로 배정받았는지까지. 굳이 그 애가 묻지 않은 것들까지 하나하나 알려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었다. 그런 라베가 신기하면서도 말하는 것이 꽤 재밌는지 옆에 선 애는 계속 고갤 끄덕여주며 라베의 티엠아이를 열심히 경청해줬다. 라베는 새로 사귄 친구와 한참을 대화하고서야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무대 위에 서서 연설하던 교장은 어느새 내려오고 있었고 그 뒤에선 다른 이가 무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푸른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베이지색 니트 조끼 위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푸른 머리카락은 무대 정중앙에 멈춰서야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키가 평균보다 좀 더 큰 라베의 자리는 체육관의 끝자락에 있었고 무대는 그와 정반대 방향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럼에도 라베는 무대에 선 이의 눈을 제 짙은 금안에 확실히 담을 수 있었다. 제 시력이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한순간 마주친 무대의 그에게서 라베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뒤에서 선배 얘기나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옅어지고 앞에서 괴담을 주고받는 이들의 목소리까지 옅어진다. 제 옆에서 멍하니 앞만 바라보는 절 두드리며 뭔갈 말해주는 이의 목소리 또한 옅어지기 시작했다.

“야, 그래! 저 선배…… 아까 마주친 그 선배가…… 유명하던데…….”
“……입학식 날에 눈이 마주치면…… 졸업식 날에…… 된다던데…….”
“……너 왜 갑자기 멍하니…… 라베? 너 뭐하…… 야, 저 선배가 이번 입학식의 하이라이…….”

쿵쿵쿵

누군가가 바닥에 마이크라도 떨어트렸나 봐. 불규칙적으로 제 귓가를 내리찍는 둔탁한 소리에 라베의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단정하게 묶여있던 리본 위로 손이 올라간다. 이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벽에다가 켜진 마이크를 두들겨대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러지? 오늘 아침도 잘 먹었고 열도 안 났고 컨디션도 좋았다. 오는 길의 버스에서 자리 하나가 비어 앉아서 등교했고 이상한 인사를 내던졌음에도 친구 하나를 단숨에 사귀었다. 평소처럼 운도 좋고 컨디션도 좋은데 몸이 영 이상하다. 열이 나는 거라면 보통 몸이나 머리에서부터 열이 나지 않나? 이상하게도 귀가 터질 것만 같이 뜨겁다. 라베는 덤덤한 눈빛으로 한 손을 얼굴까지 올린 채, 선서문을 읊는 그를 바라봤다.

아직 피지도 않은 벚꽃을 연상케 하는 짙은 분홍색. 모두가 한 손을 그를 따라 얼굴까지 올리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읊는다. 그 수많은 사람 속에서 유일하게 손조차 올리지 않고 무대 위의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올리지도 못하겠는거지만. 한순간에 멍해진 정신에 라베는 정신에 따라 멍해진 시선으로 오로지 선서문을 읊는 푸른 머리카락의 선배만을 바라봤다.



불규칙적으로 쉼 하나 없이 두들겨대던 마이크가 크게 한번 제 가슴 속에서 부딪히더니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짙은 분홍색 눈동자와 밝은 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에 홀로 떨어진 느낌. 그 느낌과 함께 단숨에 제 가슴을 치고 올라선 감정 하나에, 라베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리곤 제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한 감정을 느릿한 호흡과 함께 풀어냈다. 그러니까, 질질 끌지 않고 말해보자면.

아무래도 이름 하나 모르는 저 선배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