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마법사의 약속) / HL(드림)
To. 메리님께
살면서 꽤 다양한 형태의 편지나 서신을 써왔던 걸로 기억하지만, 당신에게 쓰는 편지는 이게 처음이라 어떻게 시작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어떻게 쓰든 메리님 눈엔 안 차는 편지가 되겠지만 너무 싫어만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메리님이 떠나신 지 벌써 1년이 지나간다는 게 아직도 안 믿깁니다. 메리님을 잊고 살았다느니, 그런 건 아닙니다. 아직 전 당신이 여전히 제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떠나보낸 이보다 먼저 떠나버린 이가 더 아팠음을 아는데, 어떻게 제가 메리님을 원망하겠어요. 오히려 당신이 그렇게 아프게 떠나가는 동안 제가 해줄 수 있던 게 없어서 미안함만이 남을 뿐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당신을 원망하는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가 있긴 합니다. 사실 이건 제 감정에만 치우친 원망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메리님께 남은 원망이라면, 아무래도 메리님의 생일이겠죠. 꽤 오래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생일은 어디서 들으셨는지 챙겨주시던 당신에게 제가 당신의 생일은 언제인지 물었던 때, 기억나시려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 그때 말씀하신 메리님의 말은 정확히 기억납니다. 하필 다른 말들도 아니고 이런 말들만 이제야 생생하게 나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때 메리님께선 딱히 생일을 안 챙기신 지 오래되어 언제인지도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도 챙겨주고 싶다고 하니까 메리님께서 한 번 직접 정해보시겠다고 했었습니다. 살면서 생일 언제냐고 물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긴 하지만,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기억을 되새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생일을 다시 정해보겠다고 한 사람은 처음이라 사실 그때 좀 당황했었습니다. 그러고 한참을 고민하시더니 고르신 날짜가 제 생일인 5월 16일이더군요. 왜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제 생일과 같은 날로 하시냐는 제 질문의 메리님 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해주셨던 말을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면,
매년 한 번씩 챙기는 날이라면 한 번에 챙기는 게 편하기도 하고, 굳이 챙긴다면 나에게도 소중한 날이었으면 한다. 였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땐 겉으론 별말 안 했지만, 지금에서야 말해보자면 그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던 이유는 속으로 꽤 감동을 하였기에 그랬었습니다. 메리님께서 제 생일을 소중한 날이라고 말씀해주신 게 사실 전 감동받았었거든요. 너무 뒤늦게 말씀드리는 속마음인가 싶네요. 물론 그 당시의 당신이라면 당신이 떠날 날까지 제가 당신의 곁에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하고 정했던 것도 컸을 테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메리님의 예측이 틀리셨습니다.
……서로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서로 매번 챙겨주자고 먼저 말씀하신 건 당신이라서, 아무래도 제게 이런 제 감정에만 치우친 원망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리님의 말씀대로 저는 올해도 당신과 저의 생일을 직접 챙기려고 합니다. 메리님께 편지와 함께 보내드릴 것이 뭐가 있을까, 꽤 오랫동안 고민하며 메리님의 물건을 찾아봤습니다. ……어째선지 당신은 당신의 물건은 애초에 남겨두질 않았더군요. 당신의 집엔 당신이 쓰던 접시나 당신이 입던 옷 말고는, 제가 선물한 꽃에 시들지 않는 마법이나 걸어둔 오래된 꽃 몇 송이…… 제가 드린 선물들이나…….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사실 목적과는 다르게 당신의 물건 하나쯤은 제가 갖고 있고 싶었거든요. 메리님은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물건과 함께 있으면 당신과 있던 기억들이 희미해지지 않겠지 하는 마음이 큰지라,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기왕이면 이 편지를 직접 전해주고 싶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으니 당신의 장미꽃과 편지, 그리고 당신의 생일 선물을 함께 태워 보내려 합니다. 메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뭔갈 고르는 재주가 없다 보니, 메리님께서 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실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나름 열심히 고민하고 준비한 것이니 마음에 들어 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메리님께는 이제껏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전 제 나름대로 당신이 어딘가에 편히 정착하길 속으로 깊이 바라왔었습니다. 제가 처음 본 당신은 어디론가 당장이라도 떠날 이였으니까요. 메리님은 어떨진 모르겠지만 우습게도 전 그 정착할 곳에 제가 있기를, 당신의 시간 속에 늘 제가 있기를 항상 바라왔었습니다. 그리고 메리님도 그렇게 생각해주실 바랐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생일에 서투른 제 편지와 함께 이에 대해 묻고 싶었었습니다. 저는 항상 메리님보다 늦나 봅니다. 이번에도 늦어버렸네요.
늘 당신이 어딘가에 편히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그곳엔 오래 정착하지 않길 감히 바랍니다. 이젠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 편히 가셨으면 합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습니다.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제가 있었음에, 안도하고 감사했습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메리님.
from. 레녹스
***
불을 피운다. 레녹스는 제 눈앞의 피어오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허허벌판과도 같은 들판 끝자락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푸른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품에 안긴 물건들은 제 가라앉은 마음에 비해 턱없이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당장이라도 놓아버리면 절 두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아니, 이미 날아가 버린 건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두 발이 천천히, 열기로 가득한 불 앞으로 뻗어진다. 한 걸음, 두 걸음. 뻗어지던 두 발은 장작 위의 열기 코앞에 멈췄다. 레녹스는 품에 있는 물건들을 제 붉은 눈동자를 굴려, 평소보다 더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마치 마지막으로 제 눈에 담아내는 것 같았다.
느릿한 손이 집어낸 건 편지지 두 장이 담긴 새하얀 편지 봉투 하나. 레녹스는 제 손에 들린 편지지를 피어오르는 불꽃 끝자락에 떨어트렸다. 새하얀 편지 봉투는 붉은 것과 맞닿자마자 단숨에 까맣게 타버렸다. 그다음은 그의 장미꽃. 앞 편지 봉투처럼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장미꽃을 타오르는 열기에 떨어트린다. 그의 손에 있을 땐 새것과 같아 보였던 것인데. 그가 떠나고 제 손에 들어오니 이렇게 볼품없이 낡아 보일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이자 마지막. 레녹스는 제 품에 남은 마지막 물건을 손에 쥐었다. 회색 주머니 하나. 오므려진 입구를 두 엄지로 벌려, 주머니 안의 진짜 물건을 꺼냈다. 레녹스의 검지 손톱만 한, 짙은 초록빛 가득 머금은 에메랄드 하나. 레녹스는 그것을 한참 동안 손에 쥐었다.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손바닥에 쥐어진 에메랄드의 표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딱딱하고 어딘가 날카로운 것 같으면서도 매끄러운. 5월의 탄생석은 에메랄드래요. 그 누구에게도, 하다못해 제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제 손에 쥐어진 에메랄드를 뜨거운 열기 속에 떨어트린다.
허공에 뻗어진 텅 빈 손과 손가락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레녹스는 뻣뻣해진 제 손을 최대한 자연스레 쥐며 뻗었던 손을 다시 거뒀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린 열기에 데인 것만 같은 붉은 눈가에 바람이 닿을 때마다 시린 감각이 제 몸속을 파고들었다. 바람에 저 너머로 흩어지는 까만 재와는 달리 물에 젖은 듯 무거워지는 제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어진다. 당신에게 쓰고 싶던 말들을 차마 다 쓰지 못했다. 늘 좋은 곳에 정착해서 편히 살길 바라던 당신이기에, 제가 쓰고 싶은 진짜 말들을 써버리면 당신이 편히 떠나지 못할까 봐. 그 누구보다 당신이 그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고 편히 훨훨 날아가 주길 바라기에. 그렇기에 레녹스는 시린 감각에 파묻힌 눈가와 아직도 에메랄드의 감각이 남아있는 손에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제 일그러진 눈썹을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늘어트렸다. 그리곤 이번엔 제 앞의 뜨거운 열기까지 닿을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린다. 언젠가 한 번, 흘려들었던 주문을.
“……위험할 때는 선의의 마녀님이 구하러 오시는 걸 상상해보게…….”
제 약지에 끼워진 초록빛으로 빛나는 반지에 시린 눈가를 묻고, 그의 형상을 떠올린다. 선의의 마녀, 메리의 형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