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H_ 2022. 6. 2. 17:18

누가 그랬는데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란다. 상자 자체가 바보란 게 아니라 그 상자만 계속 보게 되면 바보가 되는 거랬다. 어릴 적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네모난 상자만 계속 본다고 바보가 된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원래부터 바보였던 게 아닐까.

 

여루는 같은 자세로 굳어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분명 푹신하다고 생각했던 소판데 계속 누워만 있으니 어째 돌침대처럼 딱딱하다. 먹먹해진 머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끝은 누군가의 동아줄이었다. 한참 머리를 중심으로 상체를 비틀거리던 여루는 힘겹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온몸이 땀에 푹 절여졌다. 내가 무슨 피클도 아니고. 흰 반팔을 위로 끌어올려 젖은 이마와 콧잔등을 닦아냈다. 몇 시간째 텔레비전만 봤더니 눈이 뻑뻑했다. 비타민이 모자란 사람처럼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쥐 난 두 다리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자리에 다시 앉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겨우 일어났는데 몇초 만에 다시 앉아버리면 또 몇 시간 뒤에나 일어날 것 같았다.

 

누군가 땀에 젖은 관자놀이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드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운 시야를 진정시킬 겸 아무거나 잡았다. 둥근 윗면과 밑가슴까지 오는 높이. 식탁 의자였다. 허공을 더듬거리며 쥐 난 두 다리로 닿는 대로 걸었다. 허우적거리던 양손으로 판판한 무언갈 짚었다. 이번엔 식탁이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던 여루는 움직이길 포기했다. 식탁에 머리를 조아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검정 시야는 팽팽 돌았고 귓속에선 들리지도 않던 이명이 앵앵거렸다. 모기가 귓구멍에 처박혀도 이딴 소리는 안 날 터다. 찢어질 듯한 이명과 일그러지는 시야는 여루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이 잦아들수록 함께 잠잠해졌다.

 

여루는 저릿하던 두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어지고 나서야 식탁에 처박혔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며칠째 새벽에 소파에서 자다 깰 때마다 이렇게 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처음엔 스트레스겠거니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침대에서 잘 때는 악몽을 꾸더라도 두통이나 식은땀은 나질 않았고, 소파에서 홀로 잘 때는 그 반대였다.

 

물기 없는 싱크대를 더듬던 여루의 창백한 손이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물통이 들썩였다. 냉장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황빛에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안을 둘러봤다. 지금 여루에게 필요한 건 먹을 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은 게 없었다. 저녁에 하도 배고파 하늘이 사다 놓은 도넛을 하나 먹었지만, 그마저도 아까 변기에 얼굴을 쑤셔 넣고 게워냈다.

 

찾았다. 아까 하늘이 남겨둔 도넛 박스다. 구석에 놓인 커다란 도넛 박스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여루는 자리에 앉으려다 허리와 다리에 힘을 줬다. 어지러움과 더위, 두통이 모두 가니 이젠 쌀쌀하다. 식은땀을 닦아내서 그런 것 같다. 이마저도 이젠 익숙해진 여루는 식탁 앞에 서서 박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글레이즈 도넛 두 개와 초콜릿 시럽이 뿌려진 도넛 하나, 하얀 가루에 묻혀진 도넛이 하나 있었다. 맛은 상관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바로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얀 가루에 묻혀있던 도넛이었다. 크게 한입 베어 무니 그 안에 있던 블루베리 잼이 흘러나왔다. 퍽퍽한 밀가루 반죽을 어금니로 꼭꼭 씹어먹었다.

 

평소라면 입술이나 입 주변에 가루가 묻을까 조심히 먹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입 주변에 하얀 가루를 잔뜩 묻힌 여루는 입안에 아직 넘기지 못한 것이 있음에도 아까보다 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거실과 부엌엔 여루가 퍽퍽한 도넛을 씹는 소리와 힘겹게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반 넘게 도넛을 먹으니 이젠 목이 막혔다. 물이 마시고 싶었지만 식탁을 짚은 다른 손을 들 자신이 없었다. 상체의 중심이 저 한 손에 다 몰려있었기에 여루는 남은 것을 입 안에 쑤셔 넣을 때까지 식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루는 지독하게 단 도넛을 버겁게 씹으며 고갤 들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쿠션과 큰 담요, 커튼으로 꽁꽁 싸맨 창문, 어느샌가 꺼져있는 거실 에어컨. 꿀꺽. 입 안에 있는 커다란 음식물을 드디어 삼킨 여루는 그제야 알았다. 거실의 공기는 새벽이라 쌀쌀하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후덥지근하다.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는 뜨거운 피부를 쓸어내리며 눈알을 크게 굴렸다.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주변에선 하얀 가루가 뚝뚝 떨어졌다.

 

혀가 마비될 것만 같은 단내에 혀에 쥐가 난 듯 아리다. 원래 이렇게 달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마지막으로 먹었던 때가 아마 소연이와 함께 먹었을 때인 것 같다. .……그때는 먹을 만했는데. 오랜만에 떠오르는 소연의 얼굴에 여루는 속이 쓰렸다. 위액까지 토해낸 위에 밀가루 반죽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그런가 속이 더부룩하다.

 

뚝. 싱크대에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여루는 그 소리가 자신의 뒤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주현의 방을 노려봤다. 어깨는 움츠리고 테이블을 짚던 두 손은 주먹을 쥐었다. 자기 모습을 도넛 박스 옆 투명한 유리잔으로 보았을 때, 여루는 더부룩한 속을 참고 버틸까 했지만 결국 또다시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네모난 상자에서 휴지 두어 장을 뽑아 속에서 치미는 걸 토해냈다. 이상하다. 내가 바랐던 스무 살의 나는 이랬던가. 속을 게워내고 휴지를 뭉쳐 버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벅벅 문지르며 여루는 구부렸던 상체를 완전히 폈다. 터덜터덜, 쥐가 풀렸음에도 힘없이 내디뎌지는 두 다리의 끝은 또 소파였다. 혀끝에 남은 설탕의 단맛을 느끼며 여루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상하게 열일곱의 어린 소녀들이 떠오른다. 점심시간, 교실에 둘러앉아 미래의 멋진 자신을 설명하던 한참 어렸던 소녀들. 그 구석엔 창가에 앉아 과일 주스를 마시는 여루가 있었다. 모두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어른을 꿈꾸며 웃음에 반이 절여진 수다를 떨었다. 모든 시선이 여루를 향했을 때, 열일곱에 불과했던 여루의 스무 살은 어땠더라.

 

여루는 더듬더듬, 아까 소파에 마구잡이로 던져뒀던 리모컨을 집었다. 빨간 버튼을 꾹 누르니 큰 빛이 여루의 시야를 덮쳤다. 아마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이었기를 바랐을 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오래된 영화 채널에선 이 시간마다 상영하는 오래된 영화가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루는 햇빛을 직접 오랫동안 보질 못해 창백해진 손으로 이미 깨끗해진 입술을 닦아냈다. 더러운 것을 병적으로 닦는 사람처럼, 입술이 틀어지고 손등이 시뻘게질 때까지.

 

열일곱의 권여루는 모를 터다. 스물의 권여루는 상자에 빠진 바보가 되었다. 원했던 평범한 삶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상자 속 평범한 삶을 동경하며 바보가 되길 자처했다. 열일곱의 늦여름, 기억나지 않는 선생이 틀어준 영화 속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여루는 쿠션을 베고 눈을 감았다. 값비싼 스피커에서 나오는 연주는 그날의 연주보다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