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H_ 2022. 4. 16. 12:18

교회의 큰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햇빛이 내리비칠 때면 레니발렌의 붉은 눈동자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갈 쫓았다. 햇볕에 그을려 허공을 떠도는 먼지였다. 이상하게도 교회는 늘 그랬다. 넓든 좁든 십자가를 비낀 햇빛이 교회 안으로 내비칠 때면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허공을 날았다.

 

레니발렌은 그 먼지와 뜨거운 햇빛 아래 고갤 숙인 이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의 하나뿐인 누나, 리엔시에였다. 귀는 끝이 뾰족하고 숙인 고개 아래로 흘러내리는 밀색 머리카락 사이로 느슨히 감은 두 눈이 보인다.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이어지는 기도. 레니발렌은 교회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등을 편히 낡은 나무 의자에 기댔다.

 

며칠째 리엔시에만 졸졸 따라다녔다. 스토킹이라 하기도 뭐한 어린 남동생의 뒤따름이었다. 리엔시에는 자신을 대놓고 따라다니는 남동생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 뒷모습이 매정하다. 뻐근해진 작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긴 숨과 함께 가만히 정착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당당히 말했다. 리엔시에는 미쳤다고. 성녀를 사랑하는 괴물이라느니 뭐라느니. 혀가 길고 난잡한 말들이 공작저 밖을 둘러쌌다. 만약 레니발렌이 지금의 성녀를 사랑했다면 그런 말이 감히 돌았을까. 돌았다고 한들 은밀히 퍼졌을 터.

 

레니발렌은 어느 순간부터 홀로 공작저 밖을 나도는 것에 거부감이 생겼다. 밖은 자신의 누나를 향한 무시가 가득했다. 그게 참 듣기 싫었다. 하루는 레니발렌이 근처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리엔시에를 보며 수군거리는 두 여학생을 봤다. 정말 성녀를 사랑하냔다. 흘리듯 말했을 질문. 그게 이 기이한 스토킹의 시작이었다.

 

리엔시에의 하루는 겉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겉이 아닌 생활 속에 이미 스며들다 못해 적셔진 성녀였다. 리엔시에는 자신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에 성녀를 몇 번씩 읊조렸다. 여기까진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도 리엔시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얼굴을 내밀던 레니발렌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내용이니까.

 

그가 정말 알고 싶던 건 제 누나가 성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다. 어쩌다 리엔시에는 추락한 성녀라 불리는 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레니발렌은 공작저 특유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벌려져 길게 쭉 펴졌다.

 

일순 얌전히 가라앉던 먼지가 햇빛과 함께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러다 다시 숨이 죽은 듯 내려앉았다. 그 지루한 광경 너머로 여전히 고갤 숙인 채 두 손을 모은 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며칠간 리엔시에를 따라다닌 레니발렌의 결론은 모르겠다다.

 

그 어디에도 리엔시에가 성녀님을 사랑할 이유라는 건 없었다. 애초에 접전도 그리 깊지 않아야 할 두 사람이었으니. 정말 누나는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첫눈이었을까. 사랑할 이유가 없는 성녀를 운명처럼 사랑하고 있는 제 누나를 보고 있자니, 레니발렌은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게 읽어주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어느 극작가가 쓴 비극적인 두 가문의 사랑 이야기. 운명임을 망각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져버린 어리석은 인물들. 레니발렌은 자신이 뒤에 있음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는 무정한 이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만 기도하고 같이 놀아달라고 보채고 싶었다.

 

하지만 레니발렌은 그럴 수 없었다. 언젠가 봤던 장면처럼, 길거리서 이름 모를 노인이 팔던 거친 유화 그림을 흘겨봤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그렇게 레니발렌은 리엔시에의 긴 기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리비치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 중앙에 걸치고나서야 리엔시에는 자리서 일어났다. 오랜 기도로 흐트러진 밀빛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뒤를 돈다. 레니발렌은 더 이상 이 무의미한 스토킹을 이어갈 필요를 찾지 못했다.

 

오랜 시간 자신의 누나의 뒤만 바라보며 앉아있던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과 함께 푼다. 리엔시에는 흘끗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다시 앞을 보고 활짝 열린 교회 문을 향해 걸었다.

 

“……리엔시에!”

 

같이 가. 레니발렌은 뒤늦게서야 리엔시에를 쫓아간다. 누나는 모르겠지. 늘 그렇듯 끝까지 다 읽어주는 책이 손에 꼽을 정도로 먼저 절 떠났으니, 그 극작가의 책 결말도 모를 터다. 레니발렌은 사랑하는 누나가 그 책의 마지막 장을 읽지 않길 바랐다. 읽어버린다면 똑같은 선택을 해버릴까봐.

 

곧 해가 지려는 지 주황빛 노을이 넘어가고 있었다. 초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레니발렌은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그 긴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그 뒷모습은 덜 마른 유화처럼 닿으면 번질 것만 같았다.